“부사장님이 찾으세요.”

“지금 외부에서 미팅 중인데, 혹시 무슨 일이신지 아세요?”

구조본에서는 툭하면 불러댔다. 그냥 전화로 물어보면 될 정도로 간단히 뭘 확인하는 사안도 비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급히 찾으신다’고 알려왔다. 당연히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아, 그저께 나한테 보여준 자료 있지, 그거 다시 한번 보내줄래?” 늘 이런 식이었다.

회사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서 구조본 내 각 팀장들은 거의 가정을 버리다시피 일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부족했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전략회의야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시간은 일에 열중해야 했다. 게다가 회사 내부에 처리해야 할 일도 일이지만,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시급했다. 한 시라도 더 빨리,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회사 상황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시각을 긍정적으로 돌려 놓는 것이 엄한 사고 후 뒤치다꺼리 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나았다.

일년에 점심 약속 250회, 저녁약속 150회씩 몇 년씩을 지내다 보니, 어이없게 집이 이사하는 날 정작 내가 이사 가는 집 위치를 몰라서 헤매기도 했을 정도다. 학교에서 주중에 하는 발표회며 학부모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운동회나 학교 축제 같은 행사도 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지났다. 게다가 여름 휴가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서, 아이들로부터 ‘놀기 싫어하는 아빠’ 또는 ‘놀 줄을 모르는 아빠’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신념을 가지고 안밖에서 뛰는 직원, 심심하면 불러들여

툭하면 터져 나오는 회사의 위기 상황과 관련된 뉴스들은 엄혹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마치 금방이라도 회사가 쓰러지거나 문을 닫아야만 하는 것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었다. 그러면 회사와 관련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다. 당장 임직원들의 가족들이 불안에 떨고, 주주들이나 예비투자자들이 등을 돌리고, 금융기관들은 우산을 재빨리 뺏을 방법에 골몰하고, 협상을 진행중인 파트너들은 사업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다. 단순한 기사 하나가 그냥 기사로만 존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위 방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윗사람들은 급하지도 않은 자신의 사소한 궁금증이나 필요 사항 때문에, 멀리서 전투중인 팀장들을 수시로 호출한다. 때에 따라서는 회의 중에 나온 엉뚱한 얘기를 오해해서 불러서 야단을 치기도 한다. 북돋아주고 격려해줘도 모자랄 판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진을 빼버리기 일쑤다. 일부러 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우리 주위에 그런 일들은 너무 비일비재하다. 사실 그래서 조직생활이 힘든 법이기도 하다.

위나라의 문후와 악양 이야기가 유명하다. 위 문후가 중산을 치고 싶어하자 책황이 악양을 천거했다. 문제는 악양의 아들이 중산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모든 대신들이 병권을 맡기는 것을 반대했지만, 문후는 악양을 대장으로 삼았다. 즉시, 악양은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 중산군과 대치했다.

첫 전투에서 패한 중산자는 성안으로 피한 다음 악양의 아들 악서를 불러 “네 아버지를 설득시켜 적을 물러가게 하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악양은 한 달 동안 군을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 동안 중산자를 설득해 항복하라고 했다. 중산자는 한 달이 지나도록 항복하지 않았다. 악양은 다시 한 달의 여유를 더 주었다. 이런 식으로 세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중산자는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악양이 중산군과 대치한 지 석 달이 지났음에도 성을 얻지 못하자 부하 장수들은 물론 문후 주변의 많은 신하들이 악양을 의심하고 헐뜯는 주청을 올렸다. 문후는 그 상소문들을 궤짝 안에 모아 두었다.

마침내 악양의 명령 하에 맹렬하게 공격하자 위기에 몰린 중산자는 악서를 높은 장대에 매달아 놓고 악양을 협박했다. “아버지!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아들의 다급한 외침에도 악양은 오히려 아들을 꾸짖었다. “주인으로 하여금 승전케 하지 못했고, 주인을 설득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악양은 아들을 향하여 활을 겨누었고, 중산 사람들은 곧 악서를 죽였다.

그들은 악서의 죽은 몸으로 국을 끓여 머리와 함께 악양에게 보내어 악양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악양은 사신이 보는 앞에서 국을 모두 마신 다음 일갈했다. “너의 임금이 보낸 선물 잘 받았다. 우리도 고기 삶는 가마솥이 있다. 그 솥이 너의 임금을 기다리고 있다.” 사신은 혼비백산하여 물러갔고, 대장의 결심이 단호하다는 것을 알게 된 병사들은 치열하게 공격하여, 마침내 중산을 차지했다.

문후는 큰 잔치를 베풀고, 직접 술을 따라 악양에게 권했는데, 악양의 얼굴에는 전승자로서의 자만하는 빛이 있었다. 문후는 궤짝 두 개를 가져오게 한 다음 악양에게 선물했다. 단단히 봉해진 궤짝에 악양은 금은보화를 기대했지만, 그 안에는 자기를 모함하는 상소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악양은 놀란 한편 감탄했다. “중산의 승전은 순전히 안에서 주군께서 저를 믿어 주신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공로래야 주군의 믿음 위에 약간의 노력을 보탠 정도에 불과합니다.” 문후는 “그대가 있어도 내가 아니면 등용하지 못했을 것이요, 내가 있어도 그대가 아니면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것이오.”라며 치하하며, 영수라는 땅을 주어 영수군이라 칭하게 하고, 상으로 많은 보배를 하사했다.

 

썼으면 의심 말고, 의심되면 쓰지를 말아야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나오면 으레 커뮤니케이터가 첩자로 의심을 받는다. 특히나 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이라도 실리게 되면 간첩으로 오해 받기 일쑤다. 외근이 잦고 외부인들과 자주 만나야 하는 사람은 툭하면 불러서 혹시나 뭔 일이 없는지 확인하려 든다. 커뮤니케이터뿐만 아니라 사내 임직원들이 혹시나 딴 맘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하고 수시로 감시 감독한다. 일을 맡겨 놓고서도 믿지 못하여,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이렇게 하라는 둥 저렇게 하라는 둥 지적질이 일상이다. 위화도회군이라는 결정적인 한방으로 세를 뒤집어 버리는 이성계와 같은 장군은 당연히 양날의 검이다. 잘 쓰면 적을 물리치게 되지만 잘 못쓰면 자신이 다치게 된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맥도널드라는 황금아치를 성공시킨 레이 크록에 대해서 예전부터 단편적으로 듣고는 있었지만 그가 쓴 ‘사업을 한다는 것’을 읽고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표지에 웬만한 사업가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내 인생의 바이블’이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늦은 나이에 시작한 새로운 사업이 맥도널드 사업이었고, 세상에 그토록 많은 매장이 있었음에도 어느 하나 손쉽게 연 매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킬 사람을 고용했다면 그가 방해 없이 일을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애초부터 고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에서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성공한 사업가들의 생각은 어쩜 이리도 일치할까 하고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 유명한 ‘의인물용 용인물의 (擬人勿用 用人物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내용이다. 제대로 성공한 사람 치고 이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싶다.

‘조정을 기망하여 임금을 무시했고, 적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으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모함한 죄가 크다.’ 언뜻 보면 임금과 나라와 타인을 모함한 대역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 우부승지에 내려진 선조의 어명이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다. 임금이라는 사람은 백성들을 버려두고 홀로 살겠다고 의주로 도망친 처지에 한창 적들을 상대로 왜놈들의 수륙병진 전략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여 지휘하던 구세주가 이순신 장군이었다는 것을. 이런 마당에도 훈장을 주고 응원 메시지를 전하기는커녕 죽여야 한다고 했다. 조정에서 예산을 할당해 주어서 그 유명한 거북선이 건조된 것도 아니었다. 실록을 통틀어 보더라도 비록 온갖 간사한 계략에 휘말려 비운의 생을 살긴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판단만이 정확하고 옳았다.

“지금 어디야?”

참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 근무하던 곳에서 빈번하게 발생되었던 일인데, 내부순환도로와 동부간선도로 등등 서울에서 지독한 교통체증이 반복되는 길을 뚫고 가자면 집에서 아무리 일찍 나서도 늦어지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럴 때면 회사에 있지도 않은 CEO로부터 나의 소재를 확인하는 전화가 왔었다. 외근을 나갔다가도 미팅이 길어지거나 하면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처음에 몇 번은 급한 일이 있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주변에 감시조를 심어놓고 늘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투 상황은 그 현장에서 직접 임하고 있는 장수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주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말도 되지 않는 목소리에 휘둘려서 전투 중인 장수를 수시로 불러들여서 확인하고 지시를 한다면 그 전투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회사의 명운을 짊어지고 땀 흘려 뛰어다니는 직원들도 그런 장수와 다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