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대법원은 현대오일뱅크 주식회사(이하 현대오일뱅크)가 한화그룹 김승연회장과 한화케미칼 주식회사, 한화개발 주식회사, 동일석유 주식회사(이하 김 회장 등)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액 322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상고를 한 현대오일뱅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은 2002년에 현대오일뱅크가 처음으로 김 회장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래 2015년에 이미 한 차례 대법원 판결까지 받은 적도 있어 현대오일뱅크와 김 회장 등은 15년 넘게 소송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사건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오일뱅크는 김 회장 등으로부터 한화에너지(현재의 인천 정유) 주식 400만주를 497억여 원에 사들여 합병했다. 합병을 진행하면서 현대오일뱅크는 김 회장 등과의 주식양수도 계약서(이하 이 사건 주식양수도 계약서)에 ‘한화에너지는 일체의 행정법규를 위반한 사실이 없고, 이와 관련해 행정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거나 협의를 진행하는 것은 없다. 만약 주식을 양도양수한 이후에 이러한 위반 사항이 발견될 경우나 계약상의 약속사항을 위반해 현대오일뱅크에 손해가 발생하면 김 회장 등은 500억 원 한도 내에서 이를 배상한다.’는 내용의 ‘진술·보증’ 조항을 포함시켰다. ‘진술·보증’조항이란 주식을 파는 쪽, 즉 주식 양도인이 양도 대상이 되는 주식이나 그 주식을 발행한 회사의 상태를 진술, 공개하고 보증하는 것으로 만약 주식 양도인이 진술, 보증한 내용이 진실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양도인은 양수인이 그로 인하여 손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할 계약상의 책임을 지게 된다. 재화나 용역을 사고파는 일반적인 매매계약과 달리 주식양수도 계약은 양도양수의 대상이 되는 주식 자체에 회사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담겨 있지 않아 양수인이 불측의 손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김 회장 등은 이 사건 주식양수도 계약서상의 ‘진술·보증’조항에서 자신들이 양도하는 한화에너지 주식에 아무런 하자가 없고, 만약 하자가 있다면 그에 따른 배상책임을 지겠다고 자신했지만, 사실 한화에너지는 1998년부터 현대오일뱅크, ㈜SK 등과 함께 입찰 담합을 저질렀고, 이러한 사실은 2000년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되었다. 이후 정부는 이를 문제 삼아 담합의 주체인 한화에너지, 현대오일뱅크, ㈜SK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정부로부터 소송을 당한 현대오일뱅크는 김 회장 등이 허위의 진술·보증을 하였으므로 ‘진술·보증’ 조항 위반으로 한화에너지에 대하여 발생한 322억원 상당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2002년 처음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재판은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다. 주요 쟁점은 ‘진술·보증’조항을 위반한 김 회장 등에게 배상 책임이 있는지, 만약 배상 책임이 있다면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였는데, 2002년 소 제기된 이후 2008년에서야 선고를 한 1심은 김 회장 등의 책임을 인정해 현대오일뱅크가 지출한 변호사비용 등 8억 273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어진 항소심에서 법원은 1998년 입찰담합 사건에는 소를 제기한 현대오일뱅크 역시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김 회장 등이 약속한 ‘진술·보증’조항 내용이 지켜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현대오일뱅크에 대하여 김 회장 등은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5년 대법원에서는 또 다시 결론이 뒤바뀌었다. 이 사건 주식양수도 계약서상의 ‘진술·보증’조항은 위반사실이 발견되고 그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면 ‘현대오일뱅크가 그와 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김 회장 등이 현대오일뱅크에 대하여 손해를 배상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되어야 하므로 김 회장 등은 이에 대한 계약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선고된 대법원 판결도 현대오일뱅크가 ‘진술·보증’조항 위반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김 회장 등이 현대오일뱅크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해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2015년 대법원 판결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손해배상의 범위다.

2015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파기환송된 사건을 맡은 항소심은 김 회장 등은 현대오일뱅크에 대하여 ‘구체적인 손해액 입증이 어려워’ 변호사 비용 10억 원만 배상하면 된다고 보았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은 김 회장 등이 이 사건 주식양수도 ‘진술·보증’조항에서 약속한대로 ‘한화에너지의 우발채무가 발생하거나 부실자산 등이 추가로 발견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금액이 진술·보증 위반으로 현대오일뱅크가 입게 되는 손해’에 해당한다며 손해배상액의 구체적인 범위를 판시한 것이다.

대법원의 파기환송판결에 따라 이 사건은 다시 한 번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현대오일뱅크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따라 항소심에서 손해배상액을 재산정해 항소심의 판결을 받게 된다. 현대오일뱅크와 김 회장 등 간의 15년이 넘는 장기간 ‘마라톤’ 소송이 어떠한 결말로 이어질지 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