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레빈은 1952년 8월에 태어났고, 그가 25세가 될 때까지 뉴욕의 변두리라 할 수 있는 퀸즈의 베이사이드(Bayside)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평범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집은 붉은 벽돌과 잘 깎은 잔디가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아버지는 작은 규모의 건축업자로 동네의 집들을 수리해 주면서 생활을 이어 갔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레빈의 가족은 평범했지만 가족끼리 우애가 있었으며 화목했다. 베이사이드의 고등학교들은 대학 진학률이 90%에 달해 부모들의 마음을 끌었다. 레빈의 아버지는 브루클린 등을 거쳐 베이사이드로 이사를 왔고, 레빈은 베이사이드에서 월가로 진출하는 오디세이를 꿈꾸고 있었다.

레빈의 이웃들은 그가 가끔 말썽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좋은’ 소년으로 회상했다. 레빈의 집 건너편에서 30년 이상을 살았던 딘텐패스 부인은 자기 집 앞의 눈을 치울 때면 레빈은 그냥 지나가는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레빈은 스포츠와 게임을 좋아했고, 특히 수영을 잘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는 열정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는 맨해튼에 있는 뉴욕시립대학의 분교인 바루크 대학(CUNY, Baruch)에 진학하면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가족 중 최초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미 레빈은 월가에 진출해서 투자은행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월가가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준다고 믿었다. 대학에서 그를 지도했던 교수 중 한 사람인 레오나르드 라킨 교수는 레빈이 30세가 되었을 때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목표라고 말했다고 했다.

레빈은 대학에서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냈다. 바루크대학의 교수들은 그가 열심히 공부했고, 특히 금융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라킨 교수는 레빈이 그의 19년 교수생활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2~3명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바루크대학의 잭 프랜시스 교수도 라킨 교수와 레빈에 대해 비슷한 평가를 했다. 레빈은 특출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말쑥한 용모에 매우 상냥했고 매력적인 면도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금융을 공부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었다. 그는 수업 후에도 정기적으로 질문을 했고, M&A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컨설팅 그리고 큰돈을 버는 방법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1976년 6월, 레빈은 드디어 바루크에서 희망과 야망을 가지고 MBA 학위를 받았다. 그는 월가 진출을 위해 투자은행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인터뷰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가 아이비리그의 MBA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뷰는 그에게 고통스러웠다. 대형 투자은행에서 20명을 뽑는 데 400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하버드 MBA를 비롯해 명문대의 MBA들이 그를 비웃는 듯했다. 그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는 9개월이나 노력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동안 레빈은 집에 있었고 파트타임으로 아버지와 프랜시스 교수를 도와 일을 했다. 드디어 1977년 3월, 그는 시티뱅크에 취직했다. 비록 상업은행이었지만 여기서의 경험이 월가로 갈 수 있는 거점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레빈은 기업 외환 부서에서 수습사원으로 한 주당 365달러를 받고 취직했다. 당시 그 부서는 은행에서 유망한 부서였다. 레빈은 시티뱅크에서 중요한 인물을 친구로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로버트 윌키스(Robert Wilkis)다. 그는 레빈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레빈과는 다르게 매우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하버드를 나왔고 스탠퍼드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그는 5개 국어인 불어, 독어, 이태리어, 아랍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말했다. 그는 시티에 오기 전에 월드뱅크와 미 재무성에서 근무했고, 따라서 국제경제와 경제 이슈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그들은 친구가 됐고, 그는 레빈의 내부정보 서클의 중요한 멤버가 된다.

1977년 12월, 레빈은 바루크대학 시절 만난 로리 스콜릭과 결혼했다. 레빈은 그때쯤 시티은행의 경력을 이력서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시 투자은행에 자리를 얻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스미스 바니에서 자리를 얻었다.

1978년 초, 스미스 바니가 레빈을 고용했을 때 월가는 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경제는 70년대 초반의 침체를 벗어나 활기를 찾고 있었으며, M&A 활동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 월가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1975년 5월의 고정 수수료제 폐지는 증권회사에게 새로운 영역의 개척을 강요했고, 그것은 당시 저평가돼 있는 미국 기업들을 인수하려는 M&A 활동의 발흥과 맞물리면서 기업 인수·합병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증권회사들은 각자 M&A 부서의 규모를 키우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려고 노력했다. 스미스 바니 역시 그해에 MBA 학위를 받은 사람을 10명 정도 새로 고용했다. 회사는 레빈이 학벌은 딸리지만 아이비리그 출신들과 치열하게 경쟁해 줄 것을 기대하고 그를 고용했다.

1978년 6월, 그가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난 후 회사는 레빈을 파리 사무소로 보냈다. 그것은 정례적인 훈련 과정이었지만 월가에서 성급한 성공을 꿈꾸고 있는 그에게는 마치 시베리아 유형과도 같았다. 파리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란 말인가? 이 과정은 신입들이 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직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빈은 파리에 근무하면서 유로채권을 유럽의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했고,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레빈과 그의 아내는 회사가 마련해 준 파리의 근사한 아파트에 정착했지만, 그들은 불행했다. 레빈은 뉴욕 본사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M&A 딜의 정보에서 배제되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부인 로리는 그녀대로 아무 친지도 없는 파리에서 외로움에 지쳐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1979년 7월, 레빈은 뉴욕으로 돌아왔다. 레빈은 M&A 부서 근무를 반복해서 요청한 끝에 M&A 부서의 자리를 얻었다. 레빈이 M&A 부서로 발령을 받았지만 M&A 업무는 만만치가 않았다. M&A 업무는 현금흐름의 할인 등 세부적인 수학적 작업이 요구됐지만, 레빈의 수학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이러한 작업을 부하 직원들에게 시켰다. 그중에 하버드 MBA 출신의 이러 소콜로우라는 직원이 있었다. 그는 레빈을 위해 충성했다. 매일 밤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일했다. 그렇지만 소콜로우는 불평하지 않았다. M&A 부서의 책임자인 토밀슨 힐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레빈을 불러 훈계했다. 진정한 M&A 부서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작업을 직접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기본적인 기술들을 배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레빈은 팀 전체를 잘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하지 기술적인 부분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항변했다.

그해 말, 힐은 레빈에게 정기 급여를 포함한 보너스로 10만달러를 지급했다. 그 금액은 다른 직원들에 비할 때 적은 금액이었다. 레빈은 화가 났다. 그는 윌키스를 만나 힐을 비난하면서 불평했다. 후일 힐은 레빈에 대해 매우 공격적이고 동기가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했지만, 일처리는 부주의했고 기술적으로도 미숙했다고 지적했다. 레빈은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그는 아이비리그 출신들과 경쟁하기에는 능력이 많이 부족했다. 그는 월가에서 정상적인 경쟁을 통해서는 큰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내부자거래라는 위험한 도박에 승부를 건다. 비뚤어진 야망의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은 Douglas Frantz, Levine & Co.: Wall Street’s Insider Trading Scandal (Henry Holt and Company, 1987); Michael Stone, “INSIDERS – The Story of Dennis Levine and the Scandal That’s Rocking Wall Street,” New York, July 28, 1986, 28, 그리고 판결문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