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생태연구가 김태영(사진) 작가는 지난 2012년 국내 자생 나무도감의 종합판 <한국의 나무>를 27년에 걸쳐 완성했다. 가리왕산에서 자연생태를 조사하는 김 작가.(제공=김태영 작가)

[이코노믹리뷰=최재필 기자] “눈앞에 보고 싶은 나무가 있는데, 촬영하는 것 자체도 너무 무서웠다.”

2009년 6월 중국과 북한 국경 두만강변. 버드나뭇과 채양버들을 찾아 나선 자연생태연구가 김태영(53)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채양버들을 봤다. 망원렌즈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불과 십수 미터 앞의 수목 뒤에 북한군 병사들이 국경을 초계 감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아, 남한의 공작원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두만강변에서 몸을 숙이고 셔터를 눌렀다.

김 작가는 “순간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두만강 한가운데 자라고 있는 채양버들을 처음 본 순간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 없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채양버들 나무 사진은 이렇게 책에 수록됐다.

“국내 첫 발견 중국 복분자 꽃 찍기 위해 하루에 1200㎞ 이동”

김 작가를 지난 5월 4일 서울 잠실 석촌호수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원래 김 작가 인터뷰는 일주일 전이었다. 그런데 인터뷰 하루 전날 전화가 왔다. 찾고 있는 나무가 꽃을 피웠는데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인터뷰를 연기하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사진을 찍었는지 여부가 궁금했다.

- 나무 사진은 찍었나?

“성공했다(웃음). 복분자라는 한자 이름은 중국에서 한약재로 쓸 때와 식물을 지칭할 때의 기원식물이 다르다. 한약재 복분자로 쓰던 기원식물은 지금껏 국내에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지금껏 다른 종의 식물을 복분자딸기라고 부르며 그 열매를 복분자로 지칭해 왔다. 그 식물의 한글 이름도 복분자딸기다. 물론 최근에 시중에서 복분자로 유통되는 것은 거의 다 서양 원산의 블랙베리 열매지만 일반인들이나 생산업자들은 차이를 잘 모른다. 이번에 내가 꽃을 찍은 식물은 중국에서 한약재로 쓸 때 복분자라고 부르는 기원식물이다. 어느 분류학자가 작년에 국내에서 처음 발견했는데 새로운 식물종이어서 그저 꽃이 필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급작스런 연락을 받고 바로 내려갔다. 달랑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차로 이동한 거리가 1200㎞였다(웃음).”

- 중국에서만 자라는 복분자가 국내에서 어떻게 발견된 것인가?

“식물도 이동성이 있는 생명이다.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적응하면 자생종이 되는 것이 아니면 소멸하는 것이다. 새들이 열매를 먹고 이동하면서 씨앗을 뿌릴 수도 있고, 해류로 이동할 수도 있다. 이는 나무도 마찬가지다.”

- 새로운 식물종이 발견되는 게 바람이나 해류 등에 의한 이동 때문인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순 없다. 자연의 시간 흐름은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남부지방에 서식하는 비목나무가 경기도 안양에서도 발견됐다. 단순히 바람이나 해류, 날씨 탓이라고 치부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시 두만강변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채양버들을 찍으려고 했을까.

- 채양버들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는가?

“나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버드나무 종류에 매력을 느꼈다. 숲 생태계에는 핵심종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열대지방에선 무화과나무류겠지만, 국내는 버드나무류나 참나무류일 것이다. 특히 버드나무류는 생태계 유지에 큰 역할을 하는 나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초봄에 없는 굶주린 곤충들을 불러 모으고 또 곤충이 있으니 새들도 먹이를 찾아 버드나무로 오게 된다. ‘무료급식 나무’라고 볼 수 있다(웃음). 홍수 방지, 수질정화 기능도 있다.”

“생태계 유지에 큰 도움 주는 버드나무는 ‘무료급식 나무’”

그는 “채양버들에 얽힌 일화는 책(한국의 나무)을 집필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 식물분류학의 대가는 일본인 나까이(中井猛之進) 박사다. 나까이 박사는 채양버들의 꽃 구조가 특이하다고 해서 ‘초세니아(Chosenia)’라는 학명의 속명을 따로 붙였다. 정태현 식물학 박사 회고록에도 금강산과 설악산에 채양버들 군락이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설악산을 수차례 뒤져봤지만 채양버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못 찾은 게 아니라 오동정(생물의 이름을 조사할 때 잘못해 다른 생물의 이름으로 정하는 것)인 것 같다. 대가들의 책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니 ‘내가 직접 책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 김태영 작가가 두만강변에서 찍은 채양버들의 모습.(제공=김태영 작가)

원색한국기준식물도감에 따르면 채양버들은 버드나무과의 낙엽활엽 교목으로, 새양버들이라고도 한다. 높이 20~30m, 지름 1m에 이르고 곧게 자라며 여름에는 가지가 백분으로 덮이나 겨울에는 붉게 변한다. 한국(설악산 이북)·일본·동부 시베리아에 분포한다.

김 작가는 “두만강변을 3년간 세 차례 다녀왔는데, 아직 채양버들 꽃을 못 찍었다”면서 “두만강변의 채양버들은 정말 컸다. 밑둥이 어른 두 명이서도 못 껴안을 정도였다”고 했다.

- 국내에는 채양버들이 없나.

“내가 조사한 바로는 그렇다. 채양버들은 북방계 나무다. 땔나무로 많이 사용한다. 나무가 크고, 물러서 베기가 쉽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거의 없어질 듯한데 두만강변의 채양버들은 국경선 한가운데 있으니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꽃을 아직 못 찍었는데, 한 번 더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사진을 찍고 한 차례 더 그곳을 찾았다. 꽃이 5월 상순에 필 거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꽃이 떨어진 지 일주일 정도 됐다. 그런데 내년에 다시 조금 더 빨리 간다고 꽃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올해 한국을 봐라. 식물마다 순서대로 꽃이 피어야 하는데, 날씨가 이상하니 한꺼번에 피지 않았나.”

자아성찰과 기존 책의 오류, 자연생태연구가로 이끌어

김 작가는 평범한 회사원, 통번역 전문가였다. 식물학 전공도 아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자연생태연구가 겸 작가로 변신한 이유는 뭘까. 자아성찰과 기존 책들의 오류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 왜 나무를 연구하나?

“특별히 나무라고 할 것은 없다. 산은 어릴 때부터 친숙한 곳이다. 20대 후반부터 산에 미쳤다. 사는 게 힘들 때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산에 들어간 것 같다. 여름엔 암벽, 겨울엔 빙벽 등반을 했다. 당시 산악인에겐 특정 코스를 빨리 가는 게 화두였다. ‘알피니즘’ 같은 것인데, 그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아는 것은 산길이지 산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 이후 암벽 장비 대신 카메라와 도감을 넣고 다녔다. 산과 숲의 생명을 탐구하고 싶었다. 그게 24년 전 일이다.”

김 작가는 이후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야생 초본과 나무를 촬영하고 식물의 생태 관찰 자료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지난 2011년 12월 결과물이 나왔다. 국내 자생 나무도감의 종합판 같은 <한국의 나무>가 그것이다. 이 책은 기존 사진수목도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자생수종과 방대한 사진자료를 담고 있다.

▲ 김태영 작가는 새로운 나무종을 발견하면 1년간 관찰을 한다. 겨울철 한라산을 조사하는 김 작가.(제공=김태영 작가)

- 책 이야기를 해달라.

“나무 650여종을 사진 5000여장과 함께 실었다. 책을 홍보하며 제작기간 3년, 집필기간 10년이라고 했는데 실제는 27년이다. 당시 공저자인 김진석 박사가 10년째 자료를 모으고 있었고, 다른 연구자들의 도움까지 합하면 27년쯤 되기 때문이다. 책의 사진 10장 정도를 빼면 다 저자들이 직접 찍은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 책을 만들 때 새로운 종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연구자에 따라 생물종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저자의 관점이다. 나와 김 박사는 거시적 관점을 지지한다. 나까이 박사의 낡은 분류법은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종은 사계절(1년) 관찰을 한 뒤 따로 구별할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논의하고 결정했다.”

- 개정판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조만간 나올 예정이다. 사진자료를 갖고 있지만 초판에 싣지 않는 종들이 있다. 이런 식물들을 수년간 꼼꼼하게 검증을 한 후 종의 실체에 대해 확신이 드는 경우에만 책에 추가로 넣을 작정이다. 기존에 수록된 사진들도 더욱 정교하면서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사진들로 바꿀 것이다.”

자연생태연구가 김 작가는 인터뷰 후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다양한 나무가 있는 곳이 올림픽공원이다. 나무를 알면 자연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며 올림픽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