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존재이유는 외부의 공격을 막고 적과 싸워 이기는 것에 있습니다.  존재이유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자금을 투자해 신무기를 구입하거나 자체적인 훈련을 강화하는 방안, 심지어 용병을 계약하는 방법까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구난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좋지만, 단순히 타진하는 것을 넘어 갈지자 행보까지 보여주다가 “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야”라고 입을 닦아버리면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왜냐고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면 조직의 전열이 흐트러지는 데다 이끌어 가는 자의 능력부족을 교묘하게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22일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노인층과 저소득층 중심의 요금혜택, 요금할인율 25%로 상향 조정, 공공 와이파이 구축과 보편 요금제 출시로 가닥이 잡혔어요.

큰 관심을 모은 기본료 폐지는 빠졌습니다. 노인층과 저소득층 중심의 요금혜택이 1만1000원 할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강조됐고 선택약정 요금할인율 25% 상향 조정이 실질적인 가계통신비 인하로 이어진다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가계통신비 인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타진하겠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겠습니다. 노인층과 저소득층 중심의 요금혜택은 전 국민 11.3%인 584만명이 해당된다는 설명입니다. 이들에게 월 1만1000원의 할인혜택을 제공하면 최대 5173억원의 요금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선택약정 요금할인율 25% 상향 조정으로 1900만명을 대상으로 데이터 무제한 상품의 경우 월 5만원 이하, 음성 무제한 상품은 월 2만5000원 이하로 요금이 내려간다고 합니다.

기본료 폐지가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정위가 여론의 역풍을 의식하는 대목이 다수 보입니다. 노인층과 저소득층 중심의 요금혜택이 월 1만1000원이라는 점은 기본료 1만1000원과 동일하고  최대 5173억원의 요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전망은 기본료 폐지에 따른 요금혜택 전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 국정위 발표.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여기에 겹겹으로 안전장치를 깔았어요. 보편 요금제 출시와 공공 와이파이 확충을 정책에 더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통신요금의 원가를 파악하고 이를 미래부와 논의해 장기적인 플랜을 짜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리하자면 기본료 폐지가 대책에 포함되지 않는 대신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노인층과 저소득층 중심의 요금혜택을 추진하는 한편 선택약정 25% 상향 조정, 공공 와이파이 확충, 보편 요금제 등을 더해 사회적 합의기구까지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 정도라면 ‘기본료 폐지가 대책에 포함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게 국정위의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아가 ‘기본료 폐지가 당장 포함되지 않아도 중장기적 측면에서 사회적 합의기구에서 논의될 예정이니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국정위는 발표 현장에서 “가계통신비 인하라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본료 폐지 등을 검토했으나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최민희 국정위 통신부문 자문위원도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 발표에서 “기본료 폐지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 부분은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통신비 원가를 확인하는 쪽으로도 보고 있다”면서 “기획재정부도 통신사 담합의 측면에서 꾸준히 논의하는 한편, 통신비 책정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미래부와도 협조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생각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그의 트위터입니다. 그는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 발표 후 대부분의 언론에서 ‘국정위가 기본료 폐지를 포기했다’고 쓰자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역시 언론, 기본료 폐지 포기라고 쓰는군요!”라면서 “언론들은 통신비인하=기본료 폐지로(보겠지만) 공공 와이파이 등 다양한 방향이 있다 말씀드렸지요. MB때 기본료 1000원 인하에 3년 걸렸죠. 국정자문위 한 달이 짧았고 사회적 논의기구 만들어 기본료 폐지 추진하겠단 말씀입니다”고 말했습니다.

▲ 최민희 통신부문 위원 트위터. 출처=캡처

다양한 가능성 모색과 갈지자 행보

국정위의 발표는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기본료 폐지는 일단 가계통신비 인하 대책에 넣지 않았으나 단기는 물론 중장기 정책의 일환으로 다양한 요금할인안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정위가 최초 가계통신비 인하에 있어 기본료 폐지를 강하게 추진하다 이를 포기한 순간 정책 혼란이 시작된 데 대한  반성은 없어 보입니다.  국정위 말대로 가계통신비 인하라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료 폐지라는 카드를 슬쩍 빼들었을 뿐이라면 과연 지금의 혼란이 왔을까요?

문재인 정부는 8대 가계통신비 인하 공약을 발표하면서 기본료 폐지를 최우선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선명하게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국정위는 "사실 그 방법만 있는 것 아니다. 그리고 지금 정책에는 빠졌지만 중장기적으로 살펴볼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통신비 인하=기본료 폐지’라는 공식은 문재인 대선 캠프가 먼저 제시했고 최초 국정위가 만든 프레임입니다. 그런데 이해 당사자와의 조율에 실패한 상태에서 "사실 본 뜻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을 국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가계통신비 인하 발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국정위.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강조하지만 가계통신비 인하를 두고 논란이 발생한 책임은 오로지 국정위에 있습니다. 모든 논란이 국정위의 잘못은 아니지만 애초 업계와 유연한 대화를 시도하지 않은 국정위의 실책이 컸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합의기구에 준하는 유기적인 대화가 먼저이고 그 다음 현실적인 방안을 고민해 끈질긴 설득이 있어야 했습니다.

국정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래부와 업무보고에서 갈등을 빚었고 통신업계와의 대화창구가 거의 닫혔습니다. 이런 와중에 사업자들의 격렬한 반발에 밀려 기본료 폐지를 당장 실시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최악의 수입니다.

“큰 목적인 가계통신비 인하가 핵심이기 때문에 기본료 폐지는 다양한 카드 중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이 옹색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건 가능성 모색 수준이 아니라 갈지자 행보입니다. 앞으로 선택약정 논란 및 분리공시, 통신료 원가 논쟁 등이 줄줄이 예약된 상태에서 첫 단추부터 완전히 잘못됐습니다.

▲ 국정위 발표.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좋습니다. 그렇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큰 줄기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소통의 채널을 열어두고 조금 느리지만 확실한 의사결정을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했을 뿐”이라는 말은 갈지자 행보에 가려진 소모적인 논쟁과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 등을 고려했을 때, 너무 비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