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박민규 기자] 현대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비롯,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알버트 비어만 사장, 기획조정실 김걸 사장, 상품담당 서보신 사장, 현대모비스 박정국 사장 등이 7일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생산 공장을 방문해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 SK이노베이션 김준 총괄사장, SK㈜ 장동현 사장, SK이노베이션 지동섭 배터리사업대표 등 SK그룹 경영진을 만났다. K-배터리 동맹의 큰 그림이 맞춰지는 장면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만나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다. 그 결정적 순간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최태원 SK회장과 만나고 있다. 출처=각 사

# 현대차와 삼성, LG, SK
K-배터리 동맹의 본격적인 행보는 4월 13일 벌어졌다. 당시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과 현대차 임원들은 충남 천안 성성동에 위치한 삼성SDI 공장을 방문해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인 전고체 전지 기술에 대한 설명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참석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최근 정부의 한국판 뉴딜에 대한 재계 총수들의 적극적인 화답이라는 상징성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년차를 맞아 한국판 뉴딜을 선언하며 미래차를 신성장 동력으로 지정한 가운데, 재계 1위와 2위 수장이 모여 미래차 비전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점에 시선이 집중된다.

연결고리는 전고체 전지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은 지난 3월 1회 충전에 800km 주행, 1000회 이상 배터리 재충전이 가능한 전고체전지 연구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전고체전지는 배터리의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는 전해질을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하는 것으로, 현재 사용중인 리튬-이온전지와 비교해 대용량 배터리 구현이 가능하고, 안전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임동민 마스터는 “이번 연구는 전기자동차의 주행거리를 혁신적으로 늘리는 핵심 원천기술”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다양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먼저 이재용 부회장은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논란을 두고 대국민 사과를 한 직후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만나 현장경영의 시동을 걸었고, 그 중심에 현대차와의 협력이 강조된 바 있다. 여기에 LG화학과의 연대를 통해 배터리 수급을 유지하는 현대차 입장에서는 삼성SDI와의 만남을 통해 공급처 다변화에 대한 의미있는 '신호'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왔다.

자동차 시장을 두고 벌어진 두 기업의 신경전도 흥미롭다. 삼성은 1994년 삼성중공업을 통해 상용차를 출시하며 완성차 업계에 도전한 바 있다. 이어 1995년 자본금 1000억 원으로 삼성자동차가 공식 출범했으며 1998년 3월 첫 모델인 중형 세단 SM5가 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정부는 5대 그룹 계열사 빅딜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몇차례의 변곡점을 거치며 프랑스의 국영자동차 업체 르노가 닛산자동차의 지분 36%를 인수해 탄생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Renault-Nissan Alliance)가 2000년 4월 6200억 원에 삼성자동차를 인수하는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이런 가운데 현대차는 재계 1위 삼성의 자동차 시장 진출을 극히 경계했고, 그 연장선에서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의 와병으로 경영 전면에 나선 후 전장사업팀을 출범시키는 한편 한 때 마그네티 마렐리 인수까지 타진하자 경계심은 더 높아진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협력을 통해 두 기업은 대립보다는 화합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삼성의 전고체 배터리. 출처=삼성

현대차와 삼성의 만남이 일종의 가능성 타진 및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청사진이라면, 현대차와 LG의 만남은 이미 구축된 강력한 연결고리의 연장선에서 나온 실질적인 액션플랜 동맹으로 볼 수 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비롯,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알버트 비어만 사장, 기획조정실 김걸 사장, 상품담당 서보신 사장, 현대모비스 박정국 사장 등 현대차그룹 경영진은 지난 6월 22일 LG화학 오창공장을 방문해 구광모 LG 회장과 권영수 부회장, LG화학의 신학철 부회장, 전지사업본부장 김종현 사장, 배터리연구소장 김명환 사장 등을 만났다.

LG화학이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장수명(Long-Life) 배터리와 리튬-황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 등 미래 배터리의 기술과 개발 방향성을 공유했다는 설명이다. 미래 배터리 관심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했으며 LG화학 오창공장의 배터리 생산 라인과 선행 개발 현장을 둘러봤다.

현대 및 기아차가 생산하고 있는 하이브리드카와 현대차의 코나 일렉트릭, 아이오닉 일렉트릭 등에 LG화학 배터리가 들어가는 가운데 2022년 현대차가 양산할 예정인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의 2차 배터리 공급사로 LG화학을 선정된 점이 눈길을 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한편, 두 기업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 배터리 동맹의 핵심으로 삼겠다는 의지도 강조됐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어 7일 충남 서산에 있는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생산 공장을 방문하며 K-배티리 동맹을 완성했다. 고에너지밀도, 급속충전, 리튬-메탈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기술과 전력반도체와 경량 신소재, 배터리 대여·교환 등 서비스 플랫폼(BaaS, Battery as a Service)이 핵심 연결고리다.

E-GMP 1차 공급사로 SK이노베이션이 선정된 가운데, 두 회사의 배터리 동맹은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구광모 회장이 만나고 있다. 출처=각 사

#K-배터리 동맹 설계자, 현대차
정 수석부회장은 삼성 및 LG, SK를 차례로 맞이하거나 방문하며 K-배터리 동맹을 구축했다. 국내 4대 그룹이 배터리로 대동단결하는 진풍경이다.

현대차 입장에서 배터리 및 전기차 시장이 만개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배터리 수급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번 동맹이 성사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현대·기아차는 2011년 첫 순수 전기차를 선보인 이래 현재까지 국내외 누적 27만여대 판매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위상을 강화하고 있다. 2025년까지 총 44종의 친환경차를 선보일 예정이며, 이 중 절반이 넘는 23종을 순수 전기차로 출시할 계획이다. 2025년 전기차 56만대를 판매해 수소전기차 포함 세계 3위권 업체로 올라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기아차는 글로벌 전기차 점유율을 지난해 2.1%에서 2025년 6.6%까지 끌어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연장선에서 안정적인 배터리 수급을 위해 K-배터리 동맹의 설계자로 거듭났다는 평가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팽창하며 각 플레이어들의 행보가 빨라지는 것도 현대차의 숨가쁜 로드맵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 출처=현대차

#배터리에서 전기차? 그 이상도 있다
현대차는 스마트 모빌리티 전략을 수립하며 2021년 제네시스 전용 전기차를 출시하고 2025년까지 전동화 개발에만 9조7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기아차는 플랜S를 통해 2021년 전기차 전용모델 CV를 출시하고 2026년 전기차 판매 50만대, 친환경 자동차 100만대 판매에 나설 전망이다.

그 너머에는 모빌리티 전반에 대한 야망이 있다. 현대차는 전기차, 수소차, 도심항공이라는 세 가지 액션플랜을 바탕으로 모빌리티 전략을 가다듬고 있으며 각 플랫폼이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 큰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특히 도심항공에 있어서는 우버와의 협력이 눈길을 끈다. ▲UAM(Urban Air Mobility : 도심 항공 모빌리티) ▲PBV(Purpose Built Vehicle : 목적 기반 모빌리티) ▲Hub(모빌리티 환승 거점) 플랫폼을 중심에 두고 입체적인 모빌리티 전략을 그리는 그림이다. 이 과정에서 배터리 기반의 다양한 가능성 타진이 벌어질 전망이다. K-배터리 동맹을 바탕으로 전기차 로드맵에 시동을 거는 한편 수소차와 도심항공 플랫폼을 통해 '이동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야망이다.

▲ SA-1. 사진-최진홍 기자

#거점 인프라
현대차와 SK의 만남 중 눈길을 끄는 곳은 오프라인 거점 인프라다. 실제로 정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회장은 SK 주유소와 충전소 공간을 활용해 전기·수소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빌리티 플랫폼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오프라인 거점이다. 이동하는 플랫폼에 대한 기술개발은 당연하며, 무엇보다 충전과 주차 및 이와 관련된 물류 인프라의 확장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버의 플라잉 택시 전략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우버는 CES 2020에서 우버 엘리베이트 시범 운행 계획과 2023년 상용 서비스 로드맵을 전격 밝힌 가운데, 보잉사(Boeing)의 자회사인 오로라 플라이트 사이언스(Aurora Flight Sciences), 벨(Bell), 엠브라에르(Embraer), 조비 항공(Joby Aviation), 피피스트렐 에어크래프트(Pipistrel Aircraft), 카렘 항공(Karem Aircraft), 전트 에어 모빌리티(Jaunt Air Mobility) 등 항공사를 비롯해 부동산 회사인 힐우드(Hillwood Properties), 릴레이티드(Related), 맥쿼리(Macquire), 오크트리(Oaktree) 및 시그니처(Signature)과의 협력도 공언한 바 있다. 우버에어의 큰 축이 오프라인 거점이고, 결국 부동산 회사와 만난 배경이다.

현대차와 SK의 만남에서 SK 주유소를 오프라인 거점으로 낙점한다면 더욱 다양한 모빌리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K-배터리 동맹을 넘어 이번 연쇄 회동이 모빌리티 전반의 핵심 전략을 포괄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다.

▲ 출처=LG화학

#LG화학, GS칼텍스와 만나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이 만나던 날, LG화학과 GS칼텍스가 전기차 업계 파트너들과 손잡고 빅데이터를 활용한 전기차 배터리 특화 서비스 개발에 나선다는 발표를 해 눈길을 끈다.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시그넷이브이, 소프트베리, 케이에스티 모빌리티, 그린카와 함께 충전 환경 개선 및 신사업 기회 발굴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충전소에서 수집한 전기차 빅데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배터리 특화 서비스를 발굴하는 한편 LG화학과 GS칼텍스는 우선적으로 배터리 안전진단 서비스를 개발한다는 설명이다. 현대차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은 LG화학이 GS칼텍스와 함께 새로운 배터리 가능성 타진에 나서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동맹의 리스크 둘.
K-배터리 동맹에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우선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분쟁이다. 지난 4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예비판결을 통해 LG화학이 승리했으나 SK이노베이션이 이에 불복해 현재 판결 재검토 기간을 거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비방전이 재차 벌어질 경우 동맹의 균열이 불가피하다는 말이 나온다. 다만 이번 K-배터리 동맹을 중심으로 4개 그룹 총수가 직접 만나 톤다운 형식의 논의를 시작하면, 이 문제는 금방 해결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배터리에서 시작된 전기차, 수소차, 미래 모빌리티 전반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내연기관 중심 부품 세트 생태계를 원점부터 논의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기존 협력사들과의 관계 및 달라진 환경에 따른 파트너 교체 등은 현대차 입장에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마늘동맹?
정의석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만남으로 K-배터리 동맹이 완성된 가운데 최 회장이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뒤 SK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서산 육쪽마늘을 판매중인 임시 매장에 들러 마늘을 직접 구입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올해 생산량은 크게 늘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판로가 막혀 어려움을 겪는 서산 등 전국의 마늘 농가를 돕자는 차원에서다.

최 회장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소외된 조직이나 개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망(Safety Net)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후, SK이노베이션 등 SK그룹 일부 관계사들은 어려운 농가를 돕기 위해 사무실과 공장 등에 임시 매장을 마련, 서산의 대표적 특산품인 서산육쪽 마늘을 구매하고 있다. 최근에는 출입기자들에게도 판매하기도 했다.

SK가 추구하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가 깨알같이 발휘된 부분도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