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SDI의 Prismatic Lithium-ion Battery Cell. 출처= 삼성SDI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재계 주요 기업이 현대자동차그룹(이하 현대차)과 협력 관계를 유지함으로 장기 관점의 ‘판짜기’에 들어갔다. 

현대차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5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6월 LG그룹 구광모 회장과 만났다. 이번 달에는 SK그룹 최태원 회장과의 회동이 예정돼 있다. 이는 친환경 가치의 강조로 각광받는 배터리 관련 주요기업 계열사들과 국내 최대 배터리 수요처인 현대차가 시너지를 일종의 도모하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를 ‘4자 배터리 동맹’이라고 부르며 각 기업 총수들의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왜 배터리인가, 왜 전기차인가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웨어러블 디바이스 등 현 시점에서 ‘미래 기술’로 여겨지고 있는 분야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각 기술 구현의 최적화에 있어 배터리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동수단 연료의 친환경화가 각 나라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면서 배터리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럭스리서치(Lux Research)에 따르면 전기차·ESS(에너지저장장치)·휴대용 전자기기 등을 포함하는 전 세계 배터리 시장의 규모는 2019년 590억달러(약 70조6230억원)에서 2035년 5530억달러(약 661조4433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테슬라(TESLA)社가 촉발시킨 친환경 전기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고 세계 자동차업계 순위 5위(2019년 연간 생산량 기준, 약 720만대)인 현대-기아자동차 역시 현재의 글로벌 흐름에 맞춰가기 시작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인 현대차가 필요로 하는 배터리의 수요는 배터리 관련 국내 기업들에게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큰 수요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4자 배터리 동맹? 

각 사가 주력으로 여기는 제품은 조금씩 다르지만 ‘배터리’라는 큰 범주에서 우리나라는 삼성SDI, LG화학 그리고 SK이노베이션 등 3개 업체가 경쟁하고 있다. 올해를 기준으로 가장 현대자동차와 배터리 분야에서의 협력을 위해 움직인 것은 삼성전자다. 지난 5월 13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현대차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천안 삼성SDI 사업장에서 만났다. 삼성SDI는 삼성에서 2차 전지 제조와 소재 분야사업을 영위하는 계열사다. 이 자리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자사의 주력 제품인 전고체 배터리(전해질이 액체가 아닌 ‘고체’인 차세대 2차 전지)의 개발 현황 그리고 현대차-삼성SDI의 추후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달 회동에서 만난 현대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사진 왼쪽)과 LG그룹 구광모 회장. 출처= LG그룹

두 번째로 현대차에게 손을 흔든 것은 LG그룹이다. 지난달 22일 정의선 수석부회장 등 현대차의 주요 경영진들은 LG화학 오창공장을 방문했다. LG화학 역시 2차전치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으로 특히 전기차에 특화된 배터리에 있어서는 강점이 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LG화학 전기차 배터리의 글로벌 점유율은 25.5%를 기록하며 올해 1월에서 4월 합산 기준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글로벌 1위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LG화학은 약 30년 간 진행된 배터리 부문 연구 개발 집중 투자로 현재 약 1만7000건의 전기차 배터리 특허를 확보하고 있다. 

당시 회동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우리는 고성능 전기차에 최적화된 배터리의 구현과 차량에 대한 적용을 연구하고 있다”면서 “이번 방문은 향후 현대차에서 생산될 전기차 전용 모델에 탑재될 차세대 고성능 배터리 개발 현황을 살펴봄과 더불어 미래 배터리에 대한 개발 방향성을 공유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이어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이번 주 중으로 충남 서산 SK이노베이션 배터리공장을 방문해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만날 예정이다. 두 총수의 회동 일정은 7일 화요일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삼성SDI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국내 3위 전기차 배터리 생산 기업이다. 최근 SK이노베이션은 입찰경쟁을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될 현대-기아의 세계표준전기차용플랫폼(E-GMP) 전기차에 자사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양사의 예상 거래액은 약 5년간 10조원 규모다. LG화학(24.2%)과 삼성SDI(6.4%)에 비해서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SK이노베이션(4.1%)은 현대차와의 협력으로 시장에서의 입지를 넓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해관계’라는 퍼즐 

글로벌 점유율 1%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국내 3대 배터리 업체들이 현대차를 중심으로 협력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재계는 이해관계에 근거한 ‘전략적 접근’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대차의 입장에서는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큰 흐름인 전기차를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안정적으로 전기차용 배터리를 공급받을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는 것은 장기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삼성, LG, SK의 배터리 사업부문의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글로벌 헤게모니와 관련된 문제다.  배터리 부문 전통의 강자인 일본의 자동차기업 도요타와 IT기업 파나소닉은 배터리 개발을 위한 합작법인 설립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국가의 기업들은 아시아 기업들에게 뺏긴 전기차 배터리의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정부의 ‘무한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 업체들까지 가세해 글로벌 배터리 시장은 그야말로 요동치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배터리 잠재 수요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차와 협력 관계 유지는 각사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과 직결된 문제다. 아울러 현대차로 증명되는 각 사 배터리의 성능은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과의 거래에 있어 유리한 입지를 점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신영증권 문용권 연구원은 “현대차와 삼성·LG·SK 배터리 3사간의 협력은 향후 늘어날 현대차의 배터리 수요를 능력을 대비하기 위함임과 동시에 3사에게는 서로간의 경쟁을 유발시켜 차세대 배터리 기술력을 단기간에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재계에서는 일련의 협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근거한 행보일 뿐 ‘동맹’이 아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배터리는 비단 자동차 업계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 영역과 맞물린 큰 변화로, 각 기업들은 미래에 마주할 변화들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라면서 “일각에서는 ‘4자 동맹’으로 표현하며 각 기업의 경쟁 완화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대차를 중심으로 한 각 기업의 행보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