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이 세상에서 ‘가장 정밀하고 예리한’ 절단기계를 사용해서 레몬 슬라이스를 만든다고 해 보자. 과연 얼마나 얇게 레몬을 썰어야 양면이 생기지 않을까? 머리카락 굵기의 ‘몇 십만 분의 일’ 로 레몬 슬라이스를 만든다고 해도 물리 법칙이 존재하는 한 무조건 양면은 존재한다. 

"레몬을 아무리 얇게 썰어도 양면이 있다" 이는 양자 간(혹은 다자간)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사안에 대한 결론 도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가정이다. 한 쪽의 주장도 그럴 법하고, 반대쪽 주장도 일리가 있다.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그러나 사회의 진일보(進一步)를 위해 어떤 쪽으로든 결론이 나야 한다. 우리나라 유통업계는 현재 ‘유통산업의 규제’라는 레몬을 눈앞에 두고 이를 어떻게 썰어야 할지를 수 년 째 고민하고 있다.   

 

유통산업발전법 제정의 배경 

유통산업의 성장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 했다. 그렇기에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유통대기업들은 유통산업 인프라 확장에 열을 올렸다. 각 대기업들은 일정 인구 수 이상의 상권이 형성된 전국 주요 지역에 대형 할인매장을 경쟁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요 지역 거점의 대형 인프라 확장은 각 유통기업에게 단기간에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기 관점에서 넓은 상권을 형성해 인프라 자체의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분명히 기업들에게 어떻게든 ‘남는 장사’가 됐다.

급격한 경제성장이 시작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유통산업의 구조는 자본을 가진 대기업 위주로 급속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에 정부는 1997년 유통대기업의 과열된 사업영역 확장을 제어하는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유통산업 규제안을 도입했으니 이것이 바로 1997년 4월 10일 처음으로 도입된 ‘유통산업발전법’이다. 유통산업발전법 제1조(목적)에는 “이 법은 유통산업의 효율적인 진흥과 균형있는 발전을 꾀하고, 건전한 상거래질서를 세움으로써 소비자를 보호하고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대형할인점(마트)에 대해 규제가 집중되자 마트에서 규모를 조금 축소한 개념의 SSM(Super-Super Market)이나 상품공급점 혹은 편의점 등으로 아직 진출하지 못한 국내 지역 상권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식의 경쟁 과열은 계속해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대기업들이 세분화된 상권으로 계속 진출을 시도하면서 전통시장이나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상권이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장기적 경기 불황으로 인한 매출 감소에 유통 대기업들의 상권 확장까지 겹쳐 수많은 중소상인들은 생계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일련의 상황은 지난 2013년 통계청 조사에서 2012년에서 2013년까지 1년 동안 중소자영업자의 수가 약 5만7000명 감소한 것으로 심각성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전통시장 상인과 중소자영업자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정부는 유통 대기업들의 과열된 오프라인 유통채널 출점을 더 강하게 규제함으로 소규모 상권을 보호하는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이후 유통산업발전법은 2013년에서 2017년에 걸쳐 매년 수 차례 세부 내용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현재 국내 백화점, 대형마트들은 주말에 월 2회 의무적으로 점포를 휴점하는 규정을 지키고 있다. 대기업들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간 과열됐던 유통점포 출점 경쟁은 각자에게 운영 부담으로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추가 문제제기 없이 일련의 규제들을 수용했다.    

논란의 격화 ‘2017년 개정안’ 

유통산업에 대한 규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며 논란이 된 것은 지난 2017년 9월 29일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 외 10명(이학영·최인호·박 정·박홍근·송기헌·어기구·홍의락·이재정·유동수·박재호)이 발의한 ‘유통산업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에서 시작됐다. 

대표 발의자인 홍익표 의원은 “현행법은 중소상인의 보호를 위해 대규모점포 등록 제한 및 대형마트·SSM 영업제한 등의 유통규제를 도입했으나, 중소상인의 경영여건 악화는 지속되고 있다”라면서 “최근에는 대형 유통기업들의 복합쇼핑몰, 아울렛 등 이전에 없었던 초대형 유통매장의 확대로 지역상권 붕괴는 가속화되고 업태 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고 규제의 제안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개정안이 종전까지의 규제와 가장 명확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상업 보호구역의 세분화와 규제 강화다. 현행법은 유통업 상권을 전통상업보존구역과 일반구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개정안은 이를 상업보호구역·상업진흥구역·일반구역 등 3개로 세분화했다. 그리고 전통시장이나 중소상공인의 상권보장 구역을 보호·진흥구역으로 확대하고 일반구역에 진입하는 대기업 점포는 등록제를 통해 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두 번째는 테마파크형 쇼핑몰이라고 불리는 ‘복합쇼핑몰’의 규제로 이러한 점포들을 ‘대규모점포 및 준대규모점포’라는 범주에 넣어 그 입지와 영업일수를 제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이 외로 추가되는 규정으로는 대규모점포가 일반구역에 등록할 때 해당 사업자가 현행법에서 지역협력계획서를 제출하게 했던 것 대신 지역상권발전 기여금을 지자체에 납부하게 하는 등 방안으로 철저한 소상공인 보호의 방향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정안의 방향성에 대해 유통 대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불만을 표했다. 소상공인 보호라는 목적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개정안의 세부 내용들은 대기업의 사업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불만이었다. 이에 맞서듯 전통시장과 소상공인 단체들은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본회의 통과와 적용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유통업계에서는 개정안의 시행을 두고 대기업 대 소상공인의 팽팽한 갈등구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현 정부는 소상공인 상권 보호에 대해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지난해 중국발 사드 보복 등 유통업계의 악재로 미뤄져 계류상태에 있는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논의와 통과를 올해 안으로 반드시 이루겠다”고 일관된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올해 초 중국에서 건너온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악재가 덮쳐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국내 유통업계는 그야말로 사상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의 주도로 추진될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의 논의는 현재 답보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