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를 다닌다고 다 수학에 재능이 있거나 숫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 물리, 화학, 통계학을 대학 필수과목으로 배웠지만 수식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숫자를 좋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싫어했다. 물리나 화학 시험도 계산식이 아닌 서술 문장으로 표현했다.

대학에서 물리학 지도교수가 독특했는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학과 개설한 첫 강의에서는 타과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신청해서 60명이 넘게 수업에 참여했다. 그런데 창조론을 들먹이자 학생들이 우수수 나가버렸다. 과 후배 몇 명도 엉덩이를 들썩거리기에 눈짓으로 막아서 16명이 최종적으로 남아 폐강은 겨우 면했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상상 불가의 내용을 숙제로 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황당해 하던 동기나 후배들과 달리 내게는 너무 흥미 있는 경험이었다. ‘북극해에서 대형 유조선이 좌초를 당해 원유가 무한대로 흘러나온다면 지구 기후가 어떻게 달라질까?’ ‘지구가 원형이 아닌 각진 다면체라면 지구의 기후는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상상력을 펼쳐야만 답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주제가 비현실적이어서 뭘 참고해야 할 지 다들 할 엄두를 못 냈다. 그때 나는 소설을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해서 리포트는 제출했다. 지도교수의 비현실적 과제에서 더 나아가 상상의 나래를 듬뿍 담은 내용들이었다. 교수도 그 정도까지는 예상치 못했다며 A+를 줬다.

리포트 한번과 졸업논문은 각각 40분 정도 분량의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제출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던 ‘엘니뇨'가 리포트 주제였고, 졸업논문은 ‘부산 연안 오염 실태 분석'이었다. 비디오카메라로 찍고, 아는 사람 도움을 받아 편집하고 나레이션까지 직접 했다. 역시 A+를 받았고 그 뒤 한참 동안 학과 교보재로 사용됐다는 후문을 들었다. 그 해 모든 리포트를 제출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하나도 제출 못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커뮤니케이션 키포인트, 숫자로 집약될 때 효과적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보니 키 포인트가 되는 것은 역시 숫자였다. 매출, 자산, 자본, 수익 등의 수치와 최근 수년간의 변화, 변화율 같은 것이다. 일반적 자료라 해도 숫자로 집약해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임팩트가 있었다. 생뚱한 숫자들이라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늘 곁에 두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20년 동안의 이런 습관은 남다른 능력도 생기게 했다. 내가 지금 몇 살인지도 얼른 기억나지 않고, 결혼한 지 얼마나 됐는지 하는 물음에 답하기까지 한참 걸린다. 나이가 들어선지 간단한 덧셈 뺄셈도 한참씩 걸린다. 그런데 직업병처럼 몇 년 몇 월 몇 일에 결혼 했는지, 와이프를 처음 만난 곳과 날짜를 기억하는 남자는 흔하지 않을 성 싶다. 의외로 나는 그런 포인트가 되는 것들은 잊히지가 않는다. 그게 실은 커뮤니케이션의 포인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팀원 위치에 있을 때와 달리 팀장이나 임원이 되면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팀원이었을 때는 그만하면 됐다 싶던 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팀원들의 부족한 2%를 채워주는 경우라면 긍정적이겠으나 자신의 무능함을 숨기고자 팀원들을 나무라는 경우도 많다. 잘 되면 자신이 다 한 것이요, 잘 못 되면 떠 넘기기 위해서다. 

모셨던 선배 중의 한 분은 커뮤니케이션 실무 담당 경험이 전혀 없었다. 임원이 되어서 관리분야와 커뮤니케이션까지 맡게 됐다. 그런데 보도자료나 보고서, 심지어 사사에 이르기까지 문맥이나 내용을 정리하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원래 짧은 글일수록 쓰기가 더 어려운 법인데, 귀신처럼 적확한 표현을 찾아냈다. 그냥 둬도 될만한 사소한 내용도 선배의 손을 거치면 내용이 한결 나아졌다. 타 부서에서도 복잡한 문서를 들고 와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때마다 싫은 내색 없이 도와주었기에 특별한 능력이 있으려니 했다. 

 

시도자체가 시간낭비 같아도 부딪혀보면 결과가 달라져

비결이 너무 궁금했다. 하루는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캐 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나라고 뭐 특별한 능력이 있겠냐?”

“아닌데요. 다들 제가 글을 좀 쓴다고 하지만, 제가 쓴 글도 부족한 부분을 딱딱 짚어내시잖아요.”

“써 놨으니, 내가 문맥을 좀 잡지. 난 그렇게 쓰라면 못 써.”

“처음부터 쓰는 건 어렵지 않아요. 진짜 실력은 그 속에서 찾아내는 거죠.”

“실은 오늘 그 자료 오후 내내 백 번도 넘게 읽어봤어. 소리 내서 반복해 읽다 보면 더 나은 표현이 나오더라구.”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유명대학교 상대 석사 출신이지만 문예창작을 부전공으로 공부 했다거나, 한때 작가 공부를 했다는 식의 대답을 기대했다. 그런데 A4지 절반 정도 분량의 자료를 위해 반나절 동안 100번을 넘게 소리 내어 읽은 결과였단다. 그 뒤로 나 역시 선배의 말을 좇아 열심히 따라 해 봤지만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별 것 아닌 기술 같은데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시장 한쪽에서 꽈배기 도우넛을 만드는 아저씨부터 포크레인에 칼을 달아 두부를 얇게 자르기도 하고 신문에 전단지를 놀라운 속도로 끼워 넣고 그 신문을 멀리 던져 배달한다. 콩알보다 작은 구슬 구멍을 일렬로 맞춰서 한번에 여러 개씩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드는 모습도 감탄스럽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오래 쌓이고 쌓여서 기적 같은 일이 된 것이다. 삶이란 어쩌면 하루 하루 덧없어 보이는 날들이 모이고 모여서 큰 강이 된 것이고 그런 자잘한 일에도 정성을 다하면 도통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수 년 전 근무하던 회사에서 어느 날 젊은 남자 직원 하나가 주말에 목을 멘 애석한 일이 있었다. 당시 CEO 교체 시기여서 그렇지 않아도 언론이 계속 주시하던 때였다. 공교롭게도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다. 회사가 특별히 잘 못한 것은 없었지만, 기사에 언급되는 그 자체가 두려운 상황이었다.

다행이 관할 경찰서에서 우호적이었다. 이틀째 되던 날 오전부터 팀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회사 1층 로비에서 불침번을 섰다. 퇴근시간 무렵 1층에서 기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출현했다는 연락이 왔다. 한 달음에 내려가 보니 영락없는 기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떴다. 회사는 익명으로 나왔지만 문제는 동네 이름까지 언급된 것이었다. 기사가 확산되기 전에 바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접할 일이 전혀 없었던 언론사 사회부, 전국부 담당부장이었다. 특이한 지역이라 동네 이름을 기사에서 빼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특수한 지리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대면한 언론사 사회부장은 턱도 없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일관했다. 사건사고 기사는 원칙적으로 시, 구, 동까지 언급된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이십 여 년 동안 해왔지만 처음 보는 데스크에게 원칙에 어긋나는 부탁은 살 떨리는 일이었다. 머리가 거의 다 희어진 백발의, 그것도 통신사 사회부장은 말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끈질기게 버텼던지 결국 요청이 받아 들여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주간 매체들도 있었다. 여러 매체에서 한 건 제대로 잡았다는 듯이 연락을 해 왔다. 그 오랜 동안 열심히 발품 팔고 다녔던 것이 그때 효과로 톡톡히 나타났다. 전화를 해와서 내 이름을 듣고는 이내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사건이 비화되지 않았다. 

거의 한 달 여 동안 초 긴장 상태에서 지냈다. 다행이 팀원들이 여럿이어서 서로가 모든 포탈을 매일 같이 이 잡듯이 뒤져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바로 내게 보고를 했다. 나에게 무슨 특별한 권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가서 매달렸다. 어떨 땐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가서 무려 한참을 기다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홀대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전 연락 없이 방문했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모르는 사람들은 별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하며 놀라워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온라인 매체에서 새로 부임한 CEO와 함께 자살 사건을 다루며 누가 봐도 이상한 조합의 기사가 하나 발견됐다. 반사적으로 택시를 탔다. 때마침 데스크가 출타 중이었는데, 세시간 반을 서서 기다렸다. 그 외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데스크의 외출이 길어지면서 그날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와야만 했다. 기적적인 일은 다음날 일어났다. 오전에 그 데스크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 기다리게 했다며 사과를 거듭했다. 그리고 기사는 바뀌었다. 오해를 살만한 요소들이 사라졌다.

속으로 ‘힘들었지만 엄청난 일을 한 거다, 운도 따라주었어’라며 스스로를 토닥였다. ‘이봐 임자 해보기나 했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은 일이 분명 있다. 시도 자체가 시간 낭비일 것 같은 일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 중에서도 직접 부딪혀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쏟아 부으면 되는 일도 많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 안 되는 게 어딨어?’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