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의 석유산업이 산더미 같은 빚 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출처= News Spectrum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의 석유산업이 산더미 같은 빚 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공급과잉을 완화하기 위해 감산을 제안하자 이를 즉시 거부한 이유다.

러시아가 사우디가 이끄는 OPEC과의 감산 합의를 거부한 것은 생산비가 높은 미국 셰일 석유회사들을 익사시키기 위한 것이다.

푸틴의 목표는, 지난 2018년 러시아가 보유했던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타이틀을 앗아간 미 셰일 업체들로부터 시장 점유율을 되찾는 것이다.

에너지 조사기관 클리퍼데이터(ClipperData)의 매트 스미스 원자재 조사팀장은 "러시아의 의도가 미국 셰일 산업을 마비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라보뱅크(Rabobank)의 라이언 피츠모리스 에너지 전략가도 "러시아가 부채가 많은 미국의 셰일 생산자들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라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유가 인하를 밝히면서 9일(현지시간) 국제 유가는 1991년 걸프전 이후 최저인 배럴당 31.13달러까지 떨어졌다. 산유국들이 추가 감산 대화를 재개할 거란 기대감이 나오면서 10일(현지시간) 10% 안팎으로 반등했지만, 그러나 원유 가격이 이 정도로 떨어지면 많은 미국 셰일 회사들은 생산을 줄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석유 업계 파산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SPDR S&P 석유 가스 ETF(XOP)는 2006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엑손모빌(ExxonMobil)과 셰브론(Chevron) 등 주요 정유사들의 주가는 모두 12% 급락했고, 시추 및 생산업체들은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

포화 속으로

러시아가 감산을 거부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4월 공식판매가격(OSP)을 6달러 내지 8달러 인하하고 생산량을 대폭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국영석유회사 아람코는 10일, 하루에 1230만 배럴을 생산할 발표했다. 이 수치는 최근 생산량을 27% 올린 것이며 회사의 최대 용량을 30만 배럴 초과한 것이다.

RBC 캐피털 마켓의 마이클 트랜 에너지 전략책임자는 "러시아와 사우디의 싸움에 온 세계가 포화 속으로 뒤덮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동안 OPEC과 보조를 맞춰가며 감산에 동참해왔던 러시아는 OPEC+의 감산이 미국의 에너지 산업에만 좋은 일을 시켰다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는 OPEC+의 감산을 미국 셰일오일이 번성할 수 있게 해준 ‘마조히즘’(masochism, 자학행위)이라고 비판하고 “OPEC+가 시장을 양보함으로써 값비싼 값비싼 미국 셰일오일에 시장과 생산효율을 보장했다"고 주장했다.

제재에 대한 보복?

애널리스트들은 러시아의 이번 결정이 시장점유율 경쟁을 넘어, 셰일 혁명으로 가능해진 미국의 최근 에너지 제재 움직임에 대한 보복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불과 3주 전,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로스네프트의 자회사에 대해 제재를 발표했다.

헬리마 캐피털 마켓(Helima Capital Markets)의 글로벌 상품전략 책임자 헬리마 크로프트는 "러시아의 전략은 단순히 미국의 셰일 기업만을 타깃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세일 생산으로 글로벌 원유 시장에 영향력이 커진 미국의 강압적인 제재 정책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 재정적으로도 큰 이점을 갖고 있다. 아거스 글로벌 마켓(Argus Global Markets)에 따르면 러시아는 예산의 37%만이 석유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사우디의 65%보다는 비중이 훨씬 적다. 애널리스트들은 러시아는 유가가 배럴당 42달러 수준에서 예산의 균형을 맞출 수 있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국가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유가가 적어도 70달러 수준 이상을 유지해 주어야 한다.

미국 에너지부는 10일 성명을 통해 "국가 행위자들이 석유 시장을 조작하고 충격을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미국은 이 같은 변동성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이날 아나톨리 안토노프 러시아 대사와 회담을 갖고 ‘질서 있는 에너지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가장 큰 문제는 유가가 얼마나 하락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낮은 수준에 머무느냐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우디와 러시아가 가지고 있다.    출처= Fox Business

美 석유 산업에 드리우는 공포

그 동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미 자금 난을 겪고 있는 미 셰일 산업에게 유가 전쟁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시점에 닥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의 세일 산업은 지속적인 공급 과잉, 과도한 지출, 기후변화 우려 등의 이유로 수년간 투자자들로부터 외면 받아왔다. 에너지 부문은 지난 10년 동안뿐만 아니라 당장 지난해 한 해만도 S&P 500에서 가장 큰 패배자였다. 게다가 최근의 시장 혼란 와중에 하락세를 주도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석유 산업에 더욱 깊은 도전을 제기했다. 수많은 항공기 결항, 공장 폐쇄, 출퇴근 자제로 세계의 석유에 대한 욕구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올해 세계 석유 수요는 2009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CFRA 리서치의 스튜어트 글릭만 에너지 애널리스트는 "지난 두 달은 에너지 투자자들에게 공포 영화였다"라고 썼다.

"수요충격(코로나바이러스)과 공급충격(OPEC+의 분열)이라는 두 마리 도깨비가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누가 먼저 손 내밀까?

미국 석유 산업에 드리운 공포는 에너지 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은행들에게도 덮치고 있다. 댈러스에 본사를 둔 코메리카(Comerica), 컬렌/프로스트 뱅커스(Cullen/Frost Bankers), 텍사스캐피털 뱅크셰어스(Texas Capital Bancshares)의 주식도 20% 급락했다.

대차대조표가 가장 약한 셰일 회사들은 값비싼 시추사업을 포기하고 직원들을 해고하고 현금을 비축할 것이다. 몇몇 석유회사들은 살아남지 못할 지 모른다.

클리퍼데이터의 스미스 팀장은 "이들은 이미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줄줄이 파산이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유가가 얼마나 하락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낮은 수준에 머무느냐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우디와 러시아가 가지고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주 합의 결렬 이후 사우디와 러시아간 대화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렉산더 노박 러시아 에너지장관은 24일(현지시간) 국영방송 러시아 24와의 인터뷰에서 “OPEC과의 생산협정에 문이 닫혀있지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감산에 동의할 경우 석유시장은 빠르게 반등해 셰일 석유회사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푸틴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미국 석유산업은 앞으로 더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할 지 모른다.  

헬리마 캐피털의 크로프트는 "이번 전투가 짧기를 바라지만, 잔인한 경제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장기 소모전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