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하지만 세상을 반으로 나눠보려는 시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쪽은 펴보지도 못한 책이 수두룩 빽빽이어도 기어코 책을 사 모으는 사람, 다른 한쪽은 읽을 수 있을 만큼만 책을 사는 사람. (책을 사지 않는 사람도 포함한다면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도 있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곤란할 정도로 전자에 속한다. 택배 봉투를 다 뜯기도 전에 다른 책을 주문하고 있고, 서점에 들어갔다 하면 책 두어 권쯤은 꼭 사서 나온다. 가지고 나간 책 몇 권, 새로 산책 몇 권. 이렇게 대여섯 권이나 되는 책을 짊어지고 돌아다니기 일쑤니, 책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내 에코백은 지금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책 좀 읽으라’며 타박한다지만, 우리 엄마는 우리 자매에게 ‘제발 책 좀 그만 사들여라’라고 말해야 했다. 나는 소설책을, 언니는 만화책을 벽이 꽉 차도록 사 모았으니 말이다. 책장마다 쌓이는 먼지, 쿰쿰한 책 냄새, 갈수록 좁아지는 책상과 침대. 그것도 모자라 이사라도 갈라치면 이사 업체에 ‘별도의 책 운반 비용’을 십여 만 원씩을 더 지불 하기도 했으니 엄마로써는 당연히 이 책 무더기가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물론 엄마는 이제 ‘내 집안의 공짜 서점’을 이용하는데 사뭇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래서, 책장 안의 그 많은 책들은 다 읽으셨고?’라는 식의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이실직고하자면 내 책장의 절반은 아직 읽지 못한 책들로 채워져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면 ‘산림 파괴자’라든가, ‘반 무소유정신 소유자’ 같은 무시무시한 구박을 듣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김영하 작가님이 그러셨어요.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라고”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후 책장 앞을 어슬렁거린다. 이 배회는 늘 즐겁다. 쇼케이스에서 색색의 케이크를 고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인데, 심지어 책장 안의 책은 공짜기에 더 즐겁다. (물론 과거에 그 금액을 지불했지만 그런 건 잊어버리기로 하자)

그러다 책 한 권을 골라 집어 드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책장 속 수많은 책들 가운데 한 권의 책을 뽑아드는 행위는 어딘가 운명적인 구석이 있다. 마치 타로카드를 뽑는 것처럼, 우연히 선택된 한 권의 책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와 갈증, 흥미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옛날부터 이 순간을 ‘필연의 독서’라고 부르며 반기곤 했다. ‘지금의 나는 반드시 이 책을 고를 수밖에 없었으리라’며 운명론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책을 뽑게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거라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자기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조응하는 책이 나오는 것이죠.”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중)

이 ‘의미심장한 조응의 순간’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책을 사 모으게 될 수밖에 없다. 책장 앞을 거니는 일의 효능이 이 정도니, 때마다 용한 점집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책 무더기 앞에서 서성여볼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좋은 독서는 신비스럽게도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길을 찾게도 만들고 마음껏 헤매게도 만듭니다. 그리고 세계 앞에 홀로 서게 만듭니다.” (*이동진의 <이동진 독서법> 중)

이쯤에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면, 사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읽을 만큼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온 집안을 책밭으로 만들어 놓고도 또 책을 싸짊어지고 돌아와서는 ‘아이고, 내 새끼들이 또 늘었네’하며 실실 웃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짐작된다. 책과 더불어 길을 찾고, 또 길을 잃어본 사람들은 그 효험에 중독되기 쉽다. 이 이야기는 ‘독서는 만병통치약’이라며 책을 강권하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책을 사 모으는 나, 이 글을 마무리하면 또 서가 앞을 서성거릴 나에 대한 지지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