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동물+인간-문명 3부작 2006-15, 2006, 한지에 수묵채색, 162×139cm/Nomadic Animals+Human-Civilization Trilogy 2006-15, 2006, ink and pigment on hanji, 162×130cm

허진은 서울대 재학시절 그동안 반성 없이 받아들였던 동양화의 원리와 법칙, 그리고 그 관념적 이상에 회의를 갖게 된다. 이른바 먹의 정신성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필의 운용과 여백의 포치 같은 이미 제도화된 가치관들이다.

특히 완숙함과 노경(老境)에 대한 지나친 요구는 혈기 왕성한 그가 맹목적으로 따르기에는 너무 형이상학적인 담론에 기인한 것이었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수묵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와 거대담론으로 인해 그는 작업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였고, 그야말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정체성 담론과 더불어 동양정신의 회귀에 대한 회화작업의 실현이 거론 되고 있었지만, 실제 그림에서 동양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실천의 문제에 직면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막연함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안목을 열어주었던 것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양학 강의였다. 그는 도올 선생의 동양학을 들으며 그림이란 것이 그림만 그린다고 그림이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림이 작가의 주관적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작가가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는지 인식의 문제가 우선하며, 그림이란 삶의 총체적 집적을 통한 인식을 투영하는 것이므로 통합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무엇보다도 교양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화의 실천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림이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인식한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깨달은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 동양적 형이상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정에 맞는 거침없음과 야성적 방식으로 복잡하고 다단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김백균(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