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동물+인간 2006-21, 2006, 한지에 수묵채색, 130×162cm/Nomadic Animals+Human 2006-21, 2006, ink and pigment on hanji, 130×162cm

허진의 회화 <익명인간>시리즈 역시 바로 이러한 세계의 현대적 모습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원리에 근거하여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허진이 사회를 비판하는 목적이며, 그가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문명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세계는 박제화 된 자연이며, 우리의 기존 가치관에 의해 질서화 된 세계이다. 허진은 이 질서화 된 세계를 비질서의 눈으로 바라보자고 외친다.

그의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어떠한 입장이나 처지를 떠난 그저 그 상태를 지닌 물상으로써 존재하는 일상의 존재들이다. 변기나 병따개, 핸드폰, 열쇠, 망치 같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는 물상들을 가치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 물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자물쇠를 여는 열쇠의 가치가 아니라, 그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질서가 부여된 가치가 아닌 무질서의 혼돈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가 얻게 될 마음의 평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모습에서 동물은 인위적 가치를 조작하지 않는다. 동물은 주어진 자연의 속성과 본성에 의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조성되지 않는다.

허진(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은 이것을 유목적 특성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또한 고착화 되지 않고, 토착화 하지 않는 것으로써 무엇이든 고착되는 순간 가치가 발생하고, 인간은 가치라는 욕망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허진의 그림에서 물상들은 무질서 속에 놓인다. 그 무질서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질서화 되지 않은 것을 뜻할 뿐, 그것이 자연의 이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상들은 수없는 관계 속에 놓이고, 각기 관계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가치로 전환되며 오버랩 되거나 순환한다.

△김백균(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