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금융소비자 연대회의 주최로 열린 '채무자 회생법 부칙 개정안 입법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청년이 삭발식을 하고 있다.  사진=이코노믹리뷰DB

[이코노믹리뷰=양인정 기자] 국회의 파행으로 정쟁과 무관한 민생법안들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이 가운데는 18만명의 개인회생 채무자의 운명을 바꿔놓을 채무자회생법도 포함됐다. 절망의 문턱에서 국회만을 바라보는 채무자들이 절규하고 있다. 이들은 국회가 제2, 제3의 '성북동 네 모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빚을 나눠 갚는 개인회생 제도를 둘러싼 일련의 문제를 짚어보고,  자본권력과 사법권력, 사법권력과 입법권력에 사이에서 절망하는 채무자들의 사연을 본지<빚&빛>이 들춰본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 종료를 8일 앞두고 개인회생 제도의 빚 갚는 기간 단축을 담은 '채무자회생법 부칙 개정안'이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원회를 넘지 못하고 있다. 법원행정처의 반대 때문이다. 

부칙이 개정될 경우 채권자의 재산상 권리가 침해된다는 것이 법원행정처의 주요 반대 이유다. 법원행정처의 반대 취지에 야당 일부 의원도 동조하고 있는 상황.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개인회생 채무자들은 정치권을 향해 법안 통과를 호소하고 있다. 

앞서 지난 26일 개인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일부 채무자들은 국회를 찾았다. 이들은 자유한국당 정점식 의원과 나경원 대표를 만나 탄원서 등을 전달하며 법안의 심사를 호소했다. 이날 한 채무자는 법안 심사를 부탁하다 절규하며 실신하기도 했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박주민 의원실 관계자는 법안의 상정과 관련해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면서도 "앞으로 법원행정처의 반대 사유를 감안해 조율이 가능한 지점을 찾아 대화를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기국회에서 상정하지 못하면 임시국회에서라도 통과를 시킬 수 있도록 최선의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해당 법안은 지난 21일 국회 법사위 제1 소위에서 ‘계속 심사대상’으로 결정됐다. 

법안의 핵심 쟁점은 지난 2018년 6월 이전에 개인회생 신청 채무자 가운데 3년 이상 채무를 상환한 경우, 그 시점에서 채무를 탕감해 주도록 하는 것이다. 6월 이전에 개인회생 채무자에게 상환기간 단축을 허용하자는 것. 

종래 개인회생 제도는 채무자가 5년 동안 빚을 갚도록 했다. 지난해 새로운 채무자회생법이 시행되면서 개인회생 빚 상환기간이 3년으로 단축되긴 했다. 다만 이 새로운 법은 2018년 6월부터 시행됐는데, 논란이 일고 있는 이 법안은 6월 이전 채무자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새 법이 시행된 2018년 6월 이전에 개인회생으로 3년 이상 갚고 있는 채무자는 모두 18만4172명이다. 자료=법원행정처

◆ 채무자 편에 섰던 하급심 법원

개인회생은 채무자의 월급에서 법원이 정해준 생활비를 빼고 나머지를 매달 갚아나가는 제도다. 소득 있는 채무자의 파산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다. 법원이 정하는 개인회생 생활비는 최저생계비의 60% 수준이다. 법원은 미성년 자녀와 60세 이상 부모를 부양할 때만 생활비를 증액해 준다. 

예컨대 총 빚이 1억원인 채무자. 채무자의 월급이 200만원이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녀와 노동을 하지 않는 60세 미만의 부모와 같이 생계를 유지할 경우, 법원이 인정하는 생활비는 1인 가구 생활비 100만원이다. 자녀는 미성년이 아니고 부모는 60세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채무자가 개인회생을 한다면 월급 200만원에서 생활비 100만원을 빼고 나머지 100만원씩 5년(60개월)동안 6000만원을 갚게 된다. 총 빚이 1억원이므로 5년이 되는 시점에서 채무자는 4000만원의 빚이 탕감받는 식이다.

그동안 정치권과 파산법조계 안팎에서는 개인회생 상환기간 5년이 문제로 지적돼 왔다. 외국에 비해 상환기간이 길어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고, 회생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지난 2017년 국감에서 금태섭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총 10만여 명이 개인회생을 신청했지만, 회생 재판을 받은 사람 중 35%인 7만7726만명이 빚을 갚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국회는 지난 2017년 12월에 채무자회생법을 개정해 빚 갚는 기간을 기존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했다. 빚 갚는 기간을 단축해 채무자의 정상적인 경제복귀를 앞당기기 위해서다. 

상환기간이 단축된 개정 법안은 이듬해 6월 13일부터 시행됐다. 이에 2018년 6월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개인회생을 신청한 채무자는 종전대로 5년 동안 빚을 갚고, 6월 이후에 신청한 채무자는 개정법에 따라 3년 동안 빚을 갚게 됐다.

이 같은 개정안 발표가 있자 서울회생법원이 나섰다. 법원은 2018년 6월 이전에 신청한 채무자라도 이미 3년 이상 개인회생 납부금을 냈다면 나머지 채무를 면제해주기로 공표했다. 

바뀐 개인회생제도는 그해 6월부터 채무자에게 적용될 예정이었지만, 시행 전 채무자에게도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 공표의 취지였다. 당시 회생법원은 “개정된 법률이 시행 전이라도 이미 개인회생 납부금을 3년 이상 낸 채무자에게 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은 재판 규칙상 문제가 없다”라고 밝혔다. 역시 채무자의 경제복귀를 조기에 실현 시겠다는 것이 회생법원의 의지였다. 

서울회생법원의 결정에 이어 다른 지방법원도 법 시행 이전에 조기에 기간 단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3년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며 빚을 갚아나갔던 채무자들이 상환 기간 단축을 위해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전국적으로 법원 문을 두드린 3만명의 개인회생 채무자에 대해 연이어 단축결정이 내려졌다. 지방법원 가운데 서울회생법원이 가장 많은 결정을 내렸다. 회생법원은 지난해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모두 7326명에게 기간 단축 결정을 내렸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15년 1월 1일부터 2018년 6월 12일까지 3년 이상 채무를 상환한 개인회생 채무자는 전국적으로 18만4172명에 이른다. 

단축결정과 동시에 이들은 회생납입을 중단하고 빚에서 해방되는 듯했다.

◆ 그러나 채권자 편에 섰던 ‘대법원’

지난해 3월 19일 상황이 급변했다. 대법원이 하급법원의 이 같은 기간단축 결정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서울회생법원을 비롯해 전국 법원에서 조기에 상환기간을 단축해 채무자에 적용한 것이 위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개인회생 채권을 사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대부업체 한빛자산대부(한빛대부)가 항고와 재항고를 거듭해 이 문제를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대형로펌이 이 국면에 가세했다. 법도 바뀌기 전에 회생법원이 나서 기간을 단축한 것은 채권자의 이의제기 권리를 박탈하고 손해를 발생시켰다는 것이 상소 이유였다. 

대법원은 "개정한 법 시행 이전에 개인회생절차를 밟은 채무자 사건의 경우, 채권자 등 이해관계인의 신뢰가 공익상의 요구보다 더 보호 가치가 있다"며 "채권자의 신뢰를 보호하기 위해 하급심이 조기에 기간단축을 적용한 것은 위법"하다며 대부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채무자가 매월 100만원씩 5년(60개월)을 갚으면 한빚대부가 변제받는 돈은 6000만원(100만원*60개월). 법원이 빚 갚는 기간을 3년(36개월)으로 단축했으므로 이들이 변제받은 돈은 3600만원(100만원*36개월)으로 줄어든다. 2400만원이 채권자의 손해. 대법원은 바뀐 법이 적용되기도 전에 이와 같이 발생되는 대부업체의 손해가 부당하다고 봤다. 

대형로펌이 한빚대부의 주장을 대변하는 동안, 개인회생 채무자들은 대법원까지 갈 소송비용조차 마련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하급심 법원들이 이미 상환기간을 단축한 결정은 번복됐다. 채무자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법원의 공표에 따라 기간을 단축 신청했던 채무자들은 대법원의 결정으로 다시 5년 동안 빚 갚기를 이어가야 했다. 하급심 법원의 단축결정으로 매월 납부금 멈췄던 채무자들은 대법원의 결정으로 밀린 돈을 충당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밀린 돈을 납부하지 못한 채무자들의 회생절차는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회생절차의 폐지는 빚 독촉을 받는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채무자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돈을 빌려서라도 밀린 월 납부금을 채워 넣는 것과 회생을 포기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채무자회생법에 따르면 회생절차가 폐지되면 기존에 3년 이상 갚았던 것이 모두 무효가 된다. 채권자의 빚 독촉은 다시 시작되고 일상은 무너질 것이 뻔했다.

대법원의 결정은 바꿀 수 없음으로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지난해 개정한 채무자회생법을 다시 개정하는 것. 

앞서 개정된 채무자회생법은 '부칙규정'에 따라 2018년 6월 13일부터 시행된 것이었다. 정치권과 파산법조계가 이 '부칙규정'에 방점을 뒀다. 부칙을 개정해 '6월 13일 이전의 채무자도 적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채무자가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 현재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가 이법을 심사하는 이유이면서 채무자들이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