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청와대가 22일 오후 6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의 효력을 정지한다고 발표했다. 예정대로라면 23일 0시를 기해 종료될 수순이었던 지소미아가 극적으로 살아난 셈이다. 당일까지 일본의 입장에 변화가 없으면 지소미아를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류가 강했으나, 상황이 극적으로 변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오전 충남 천안 MEMC코리아에서 열린 ‘실리콘 웨이퍼 2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우리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공급이 안정적으로 뒷받침된다면 누구도 대한민국을 흔들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MEMC코리아는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이며 대만 자본이 출자한 회사지만, 국내 실리콘 웨이퍼 자급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문 대통령이 MEC코리아를 방문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제조 강국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쓰자 일각에서는 일본에 대한 강경책이 그대로 유지, 지소미아 종료 결정도 현실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청와대가 이번에 지소미아 연장을 전격 발표하며 상황은 크게 요동칠 전망이다. 청와대는 "지소미아 중단 결정을 철회하며 WTO 분쟁도 멈출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업계의 시선이 주목되고 있다.

▲ 지소미아 중단 결정이 철회됐다. 출처=갈무리

한일 경제전쟁, 그리고 지소미아
일본은 지난 7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발표하는 한편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 제한 조치를 시작했다. 세코 히로시케 일본 경제산업상은 “한국과는 신뢰할 수 없다”면서 “신뢰하며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한국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자유무역주의 부정과는 관련이 없으며, 단지 한국을 믿을 수 없으니 안보상의 이유로 경제제재에 나선다는 뜻이다. 징용공 문제로 시작된 두 나라의 갈등이 수면위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아베 신조일본 총리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도 "일본 정부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100% 배제할 것"이라며 "한국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완전히 괜찮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한국도 반격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자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일본 정부의 결정을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거부하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으로,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외교적 해법을 제시하고 막다른 길로 가지 말 것을 경고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일본 정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지금의 도전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고 새로운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면서 “우리 경제가 일본 경제를 뛰어넘을 수 있다.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생략은 없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춰 선다면, 영원히 산을 넘을 수 없다. 국민의 위대한 힘을 믿고 정부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일본의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WTO 일반이사회 등을 중심으로 여론전에 돌입하는 한편 여야 5당의 초당적 기구인 일본 수출규제 대책 민관정 협의회도 출범시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5단체도 일본의 제재 확대를 비판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한국을 전략품목 수출 우대 국가인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깊은 아쉬움을 표한다"면서 "일본 정부가 추가 수출규제를 결정 한 것에 대해 한국 경제계는 양국 간의 협력적 경제관계가 심각하게 훼손 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면서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의 갈등을 넘어서 대화에 적극 나서주기를 촉구한다. 우리 경제계도 경제적 실용주의에 입각해 양국 경제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후로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국내에서는 유니클로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반일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일본으로 향하는 한국 여행객들의 숫자는 크게 줄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급거 일본 출장길에 오르는 등 국내 산업계도 잔뜩 긴장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은 면하기도 했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도 8월 8일과 8월 20일 한국에 포토 레지스트 일부의 술출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는 최근까지 이어져 현재 일본은 한국에 3대 핵심 수출 소재의 수출길을 모두 열어주고 있다. 다만 공급 조절은 유동적이라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분석이다.

한편, 악화일로를 걷던 두 나라의 관계는 8월 15일 광복절을 기점으로 더욱 요동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연설을 통해 책임있는 경제 강국의 길로 나아가는 한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 6대 제조강국, 세계 6대 수출강국의 당당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열었고, 김구 선생이 소원했던 문화국가의 꿈도 이뤄가고 있다"면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도록 다짐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일본과의 경제전쟁을 의식한 듯 "근대화의 과정에서 뒤처졌던 동아시아는 분업과 협업으로 다시 경제발전을 이뤘다. 세계는 ‘동아시아의 기적’이라고 불렀다"면서 "침략과 분쟁의 시간이 없지 않았지만, 동아시아에는 이보다 훨씬 긴 교류와 교역의 역사가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면서 "공정하게 교역하고 협력하는 동아시아를 함께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8월 22일, 한국은 지소미아를 종료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여기에는 일본을 압박하는 포석이 깔린 한편, 실리적 측면에서 지소미아가 종료되어도 안보상황에 큰 문제가 없었다는 상황판단도 엿보인다. 실제로 지소미아는 2016년 11월 처음 체결됐으며, 그 동안 양국간 정보교류 횟수는 29회에 그친다.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즉각 남관표 주일 대사를 초치한 뒤 담화를 통해 "지소미아는 안전보장에 있어 한일 관계를 강화하고 지역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인식으로 매년 자동 연장됐다"며 "한국 정부의 조치는 유감"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이어 미국도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미 국방부 데이브 이스트번 대변인은 "강한 우려와 실망을 표한다"면서 "우리는 가능한 분야에서 일본, 한국과 함께 양자 및 3자 방위와 안보 협력을 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후로는 전면전이 벌어졌다. 지소미아 종료 발표가 난 후인 8월 28일 일본은 한국을 정식으로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다. 비(非)민감품목 전략물자와 비전략물자 모두 수출 방식이 일반포괄수출허가에서 개별허가 또는 특별일반포괄허가로 변했다. 전략물자 비민감품목은 총 857개에 달한다.

한일 경제전쟁, 어떻게 흘러가나
최근 일본은 한국을 대상으로 액체 불화수소(불산액) 수출을 허가했다. 포토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기체 불화수소(에칭가스)에 이어 액체 불화수소까지 수출길을 열어준 셈이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최근 한국을 대상으로 액체 불화수소 수출길을 전격 열어줬다. 일본의 스텔라케미파의 물량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허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지난 7월 수출규제 발표 직후 주문한 물량이다.

일본의 전향적 판단에는 WTO 분쟁을 염두에 둔 행보이자 국내 기업의 어려움을 고려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왔다. 또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할 한국 정부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 지점에서 22일 청와대는 당일 오전까지 보이던 강경한 입장에서 지소미아 연장으로 전격 돌아선 셈이다.

업계에서는 청와대의 지소미아 연장 결정이 한일 방위비 협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방위비 인상을 요구하는 한편 지소미아 중단을 두고 강한 우려의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방위비 인상 협상카드로 지소미아 연장을 선택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입장에서는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지소미아 폐기는 동북아시아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자체는 실효성이 없다는 말이 나와도,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동맹의 굳건한 방위선이 존재해야 중국을 더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일 경제전쟁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일부 나올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이 최근 핵심 소재 수출길을 일부 열어주는 상황에서, 더욱 진전된 방안이 생기지 않겠는가"라는 기대감도 보였다. 다만 문재인 정부는 이와 관련해 정치적 타격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