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닐 쿠마르(Anil Kumar)는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의 선임 파트너 겸 이사였다. 그는 라자라트남과 와튼스쿨 동창으로 라자라트남의 내부정보 링에 있어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쿠마르는 인도의 엘리트 고등학교인 둔 스쿨(Doon School)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인도 최고의 명문으로 평가되는 인도과학기술대학(IIT)을 졸업했다. 그는 봄베이의 I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3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IIT 출신 중 유일하게 장학금을 받고 런던 대학의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진학했다. 그는 임페리얼 칼리지에 입학하면서 미국의 와튼스쿨의 입학 허가서도 받았다.

그는 와튼스쿨에 입학 유예를 요청했는데, 학교 측은 1년의 유예를 허락했다. 그는 임페리얼 칼리지의 2년 과정을 10개월에 마친 유일한 학생이 됐고,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비리그 중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빛나는 학력을 자랑하며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쿠마르는 휴렛 팩커드를 거쳐 1986년에 맥킨지에 입사했고, 후일 맥킨지의 파트너 중 가장 잘 나가는 스타 중 한 사람이 됐다. 쿠마르는 맥킨지의 CEO인 라자트 굽타와 함께 인도 IIT의 미래 전략을 위한 로드맵을 맥킨지가 제공하도록 했고, 또한 인도에 세계적인 수준의 인도경영대학원을 세우는 프로젝트도 같이 진행했다. 1988년, 쿠마르는 굽타와 함께 실리콘밸리에 맥킨지 사무소를 설립했는데, 이 사무소는 1992년에 맥킨지 전 매출액의 35%를 차지했다.

그는 뉴델리, 뉴욕, 그리고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이 있었고, 한 달에 3만 마일을 여행하며 일했다. 쿠마르의 친구들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비행기 안에 있거나 아니면 핸드폰과 함께 지낸다고 조크를 할 정도였다. 쿠마르는 3개의 핸드폰을 사용했는데, 3개 대륙 즉 아시아, 유럽,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별로 구분해 사용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가 델리에서 런던으로 이동할 때는 항상 브리티시 에어라인 1등석을 이용했다. 그는 비즈니스 이외에도 많은 사회 활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인도의 가장 큰 비즈니스 로비 단체인 인도산업연맹(Confederation of Indian Industry)의 미국 부문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라자라트남과 와튼스쿨 동문이었다. 쿠마르는 라자라트남의 정보원 중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라자라트남의 ‘VIP 5’ 명단에 들어 있었다. 쿠마르는 수년 동안 라자라트남에게 맥킨지에서 알게 된 비밀 정보를 제공했고, 라자라트남은 그 정보를 이용해서 거래했다. 라자라트남은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로 꾸준히 돈을 지급했다.

그들은 정부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쿠마르의 가정부 이름(그녀의 이름은 ‘만주 다스’였다)으로 갤리언에 차명 계좌를 열었고, 그 계좌를 통해 스위스의 유령 회사로 돈을 보냈다. 쿠마르가 정보 제공의 대가로 라자라트남으로부터 받은 돈은 약 210만달러였다.

2009년 10월 16일, 쿠마르는 라자라트남이 체포되던 같은 시각에 맨해튼 자택에서 체포됐다. 쿠마르는 FBI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면서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다쳤다. FBI는 그를 급히 병원으로 우송해야 했다. 라자라트남의 체포 소식은 이미 블룸버그에 뜨기 시작했고, 동시에 쿠마르의 이름도 옆에 올라오고 있었다.

쿠마르는 맨해튼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모빌로를 변호사로 고용했다. 그는 71세의 나이로 화이트 컬러 증권 사건의 변호 분야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모빌로는 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정치인들과 비즈니스인들을 변호하는 영역을 개척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뉴욕 남부지검의 담당 검사인 스트리터는 쿠마르가 모빌로를 변호사로 고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굴이 어두워졌다. 쿠마르가 법정에서 전면전으로 싸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리터 검사는 정부와 합의할 생각이 있다면 누구도 모빌로 같은 거물급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1월 중순, 모빌로는 자신의 옛 고향과 같은 뉴욕 남부지검을 방문했다(모빌로는 콜럼비아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남부지검에서 연방 검사로 약 10년간 일했다. 그는 남부지검의 증권수사 팀장을 거쳐 형사국 부장검사를 역임한 후 민간 로펌으로 나왔다). 그는 스트리터와 다른 검사들을 만났다. 그는 검사들이 쿠마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스트리터는 검찰이 가지고 있는 증거들, 도청 자료와 만주 다스의 계좌 정보 등을 보여주었다. 쿠마르가 라자라트남에게 정보 제공의 대가로 돈을 받은 사실, 만주 다스의 계좌를 통해 스위스 역외 계좌를 돈을 빼돌린 사실, 세금을 탈루한 사실 등은 방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증거들은 강력했다. 쿠마르가 떳떳했다면 왜 스위스 계좌로 돈을 빼돌렸는가? 배심원들에게 무엇이라 변명할 것인가?

노련한 모빌로 변호사는 고민스러웠다. 싸울 것인가, 아니면 딜을 할 것인가? 모빌로가 볼 때 정부와 법정에서 싸워 이길 확률은 크지 않았다. 만약 재판에 가서 쿠마르가 진다면 그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 모빌로는 쿠마르에게 정부에 협력하고 딜을 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쿠마르에게도 딜을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재판에 가서 진다면 엄청난 금전적인 제재금에 직면할 것이다. 그는 라자라트남으로부터 받은 210만달러를 국세청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정부에 협력한다면 금전적 제재도 상당 부분 탕감받을 수 있으며 장기간의 투옥도 피할 수 있었다.

쿠마르는 시간을 질질 끄는 재판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 측에 협력을 한다면 제대로 해야 했다. 쿠마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연방 검사에게 다 줘야만 했다.

쿠마르는 반평생 친구였던 라자라트남을 공격해야 했다. 쿠마르는 갈림길에 섰지만 가야 할 길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는 결심했고, 모빌로에게 정부에 협력하는 조건에 대한 협상을 일임했다. 2009년 12월 초, 모빌로는 스트리터 검사에게 전화를 해서 쿠마르가 협력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뉴욕 남부지검은 라자라트남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거대한 원군을 얻었다. 그는 힘든 재판을 예상하고 있던 정부 측에게 정말 중요한 증인이 됐다.

많은 언론과 미디어들은 라자라트남에게 정보를 제공했던 쿠마르의 행동에 대해 많은 논평들을 쏟아냈다. 여론은 쿠마르의 정확한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돈인가, 존경인가, 아니면 관계인가? <뉴욕타임스>는 “부, 명예, 대단한 직업, 그리고 퍼스트 클래스의 사람들과 마음대로 교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스리랑카 출신의 억만장자인 라자라트남에게 내부정보를 제공했는가?”라고 물었다.

쿠마르는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뉘우쳤다. 그의 변호사는 쿠마르가 라자라트남이 주도하는 내부자거래 작전에 가담하기 전까지 “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모빌로는 “쿠마르는 라자라트남의 거대한 작전의 먹잇감이 됐다”라고 말했다. 쿠마르는 검사에게 그가 행한 것이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아마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그는 라자라트남이 제시한 유혹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라자라트남이 쥐여 주는 돈을 계속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범죄 동기에 대해 “탐욕과 타락(Greed and Corruption)”이라고 고백했다. 라자라트남보다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더 높은 위치에 있었던 그가, 라자라트남이 흘리는 과자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고객의 내부정보를 빼돌렸다. 그는 탐욕과 타락의 대가로 빛나고 화려한 명성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가 와튼스쿨에서 라자라트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가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를 보통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졸업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