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익 작가는 이제까지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부수적 기능을 담당하던 종이를 과거의 기능에서 해방시킨다. 종이는 수단이 아닌 순수한 목적 자체다. 물질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닌 순수한 자기목적으로 이용되어 작품이 되는 과정은 현대미술이 이룬 ‘자율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작가의 표현 결과이기에 내용과 의미를 함의한다.

 

물질을 다루는 미술에 있어 내용과 의미는 외적 규명이며, 우리는 당연히 내용과 의미를 찾고 이를 토대로 작품을 규정하려 한다. 이렇게 될 때, 때로 작품은 의미를 실행하는 도구로 봉사하게 되고, 이로 인해 ‘너’로서의 종이는 그 얼굴을 잃는다.

송광익 작가는 지물의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개념과 거리를 둔다. 어쩌면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순수한 자기목적’은 불가능한 싸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개념에 저항하고 끊임없는 거리두기를 하면서 지물의 자유를 확보한다.

 

작가는 이러한 노력을 ‘힘을 뺀다.’라고 표현한다. 확보된 자유 안에서 종이는 수많은 지물로 탄생하고, 작가는 그로 인해 즐겁다. 과거 어린 시절 손에 쥐어진 종이를 가지고 찢고, 접고, 붙이며 놀았던 순수한 즐거움이 송광익 작가(서양화가 송광익,송광익 화백,한지작가 송광익,한지추상화가 송광익,KOREA PAPER,宋光翼,지물(紙物),SONG KWANG IK,ARTIST SONG KWANG IK,ソン・グァンイック)의 작품 안에 스며있다.

△글=하윤주/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