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는 드렉셀이 유죄를 인정하기 바로 직전에 드렉셀의 직원들에게 정부의 조사 진행 상황에 관한 메모를 보냈다. 그는 조사에 대비한 비용으로 잠재적 수익에서 15억달러를, 그리고 법률 비용과 기타 비용으로 1억7500만달러를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비용들은 딜을 성사시킴으로써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12월, 드렉셀이 유죄를 인정했지만 같은 달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트)이 RJR 나비스코를 250억7000만달러의 LBO로 인수하는 거래에서 드렉셀이 고수익 채권 발행의 주간사를 맡게 되자 조지프는 마치 예언자 같았다. 1988년은 연방 검찰에 유죄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한 해였다. 상반기에만 총수익이 1억1070만달러였고, 드렉셀은 고수익 채권시장에서 전년도 대비 40% 상승해서 42.8%의 점유율을 보이면서 1위를 계속 지켰다. 드렉셀은 마침내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곧 그렇지 않음이 판명됐다. RJR 나비스코 거래는 드렉셀의 마지막 빅딜이었다. 드렉셀이 유죄를 인정하기 전부터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드렉셀과 고수익 채권시장의 점유율을 놓고 치열하게 싸워왔다. 밀켄이 떠난 드렉셀은 예전의 드렉셀이 아니었다. 투자자들은 밀켄이 없는 드렉셀에게 이전과 같은 신뢰를 주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드렉셀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한 범죄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드렉셀의 오랜 고객들조차 방사능을 맞아 버린 드렉셀과 더 이상 거래를 희망하지 않았다. 특히 정부 조직이나 공공 연기금들은 드렉셀과 비즈니스를 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했다. 드렉셀이 유죄를 인정하자마자 뉴욕시는 드렉셀이 2개의 채권 공모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고, 뉴저지주는 카지노 호텔 건설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드렉셀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드렉셀은 크게 상처를 입었고 경쟁자들은 드렉셀이 흘리는 피를 즐겼다.

밀켄이 떠나자 이제 조지프가 회사를 끌어가야 했다. 1989년 4월 콘퍼런스가 끝난 무렵, 조지프는 드렉셀이 한때 회사의 근간이었던 브로커리지 업무를 포기해야 했다. 4월 18일, 조지프는 소매 브로커리지 업무뿐만 아니라 지방채 거래와 외국 주식거래도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약 50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그러한 선택은 조지프에게 고통스러웠지만 회사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또한 밀켄이 추진했던 딜도 다른 사람이 해야 했다. 여러 사람이 밀켄의 자리를 채우려 했지만 모든 딜이 실패했다. 드렉셀은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크본드를 옛날처럼 팔 수가 없었다. 고수익 채권시장의 구조와 환경도 옛날과는 크게 달라진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1989년은 드렉셀에게 재앙의 해가 됐다. 회사는 그해에 4000만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그것은 처음 발생한 손해였다. 직원의 수도 1만명에서 5200명으로 줄였다. 1989년 11월 말, S&P는 드렉셀의 CP등급을 트리플 A-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월가의 주요 회사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정크본드 시장이 무너지면서 급락하는 정크본드의 가치는 드렉셀의 중요한 고객들뿐만 아니라 드렉셀이 보유한 정크본드 포트폴리오에도 충격을 가했다. 채권들을 시장에 팔기도 어려워졌고, 드렉셀의 자산을 위험 수위로 끌고 갔다. 이제 드렉셀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지만 조지프는 드렉셀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990년 2월 5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나는 빛을 보고 있다. 최악은 우리 뒤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지프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다. 1989년 3분기까지 드렉셀은 브리지론과 팔지 못한 고수익 채권 약 10억달러 이상을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지프는 위기를 느꼈다. 1989년 9월이 시작되면서 조지프는 드렉셀을 매각하기 위해 비밀리에 월가의 주요 회사들과 접촉을 했지만, 아무도 조지프의 희망에 관심이 없었다. 회사의 CEO로서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조지프의 전화에 회신조차 하지 않았다. 참혹한 현실이었다.

드렉셀이 가진 유일한 선택은 돈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돈을 빌리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S&P가 1989년 11월에 드렉셀의 신용 등급을 낮춘 이후, CP시장이나 단기 자금 조달을 위한 전통적인 방법들은 작동하지 않았다. 드렉셀은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지만 갈 곳은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1990년이 시작되면서 드렉셀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드렉셀은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CP들조차 막을 수가 없었다. 조지프는 디폴트를 피해 보려고 월가를 미친 듯이 돌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지프는 회사를 구하기 위해 전면적인 구조 개편 계획을 준비했다. 그것은 드렉셀이 보유한 고수익 채권을 포함하여 자산을 매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드렉셀의 마지막 희망은 규제기관의 개입이었다.

2월 12일, 조지프는 뉴욕 연준 의장인 제널드 코리건에게 절박하게 전화를 했다. 뉴욕의 대형 은행들이 드렉셀에게 긴급 자금을 지원하도록 도와달라고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러나 코리건의 연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연방 정부는 드렉셀을 죽이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화요일, 새벽 1시 30분, 조지프, SEC 위원장인 리차드 브리든, 그리고 뉴욕 연준의 제널드 코리건 사이에 콘퍼런스 콜이 예정되어 있었다. 조지프는 기적을 희망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브리든과 코리건은 드렉셀이 그날 디폴트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정부에 의해 지불불능으로 압류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조지프에게 그날 아침 7시까지 결정할 시간을 주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조지프는 끝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조지프는 급하게 새벽 6시에 이사회를 열었다. 그는 이사회에서 강력한 4개 규제기관의 수장들이 드렉셀의 파산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드렉셀의 파산신청을 결의했다. 조지프는 그와 이사회가 지난 3년 동안 회사를 살리기 위해 투쟁했던 모든 노력들이,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경력이 끝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2월 13일 화요일 오후 11시 15분, 드렉셀은 파산을 신고했다.

정부와의 딜은 회사의 목숨을 3년간 연장해 주었지만,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음이 확인됐다. 조지프는 정부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지만, 드렉셀이 약해졌고 규제기관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드렉셀을 한 칼에 죽여 버렸다. 그들은 드렉셀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피셀 교수는 그의 책 제목에서 <보복(Payback)>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했다.

드렉셀의 붕괴는 시장이나 업계에서 거의 동정을 받지 못했다. <뉴스위크>는 드렉셀은 “정크본드를 옹호했고 월스트리트에서 기업 인수 열풍을 주도했던” 회사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의 파산에 대해 “80년대 탐욕의 마지막 증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타임>은 “드렉셀의 붕괴는 돈에 미쳤던 적대적 기업 인수 시대, 호화로운 삶, 그리고 부채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탐욕의 끝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드렉셀에 대한 이러한 비난의 화살은 벤자민 스타인이 <배론(Barron)>에서 드렉셀의 몰락을 나치 제국의 패망과 비교하면서 독설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그것은 마이클 밀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