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전혀 모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38살에 쓴 데뷔작으로, 1905년 문예지인 <두견새>에 그 첫 회가 실렸다. 당초 1회만 싣기로 한 이 작품은 독자들의 큰 인기를 얻으며 다음해 8월까지 총 11회에 걸쳐 연재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고양이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고양이는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뿐 이름도 없고,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고양이다. 하지만 사람 못지않은 사고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영특한 존재로,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관찰하며 삶을 살아간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날 고양이가 배고픔을 좇아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진노 구샤미(珍野 苦沙弥)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뒤부터다. 영특한 고양이가 인간 주변에서 살아가며 그들을 관찰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습게도 고양이의 시각에서 본 ‘인간’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족한 존재일 뿐이다. 집 주인인 구샤미 선생은 매일 학자라며 책을 읽는 척 하지만 책상에 앉아 쿨쿨 잠만 잘 뿐이고, 그 본성 또한 어리숙한 탓에 친구인 메이테이(迷亭)에게 놀림을 받기 일쑤다. 그렇다고 메이테이라는 인물이 훌륭한 사람인 것도 결코 아니다. 그는 미학자를 자처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의 이야기가 허풍 아니면 엉터리일 뿐이다. 게다가 그 이름조차도 만취를 뜻하는 메이테이(酩酊)와 같은 음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 또 다른 등장인물인 미즈시마 간게쓰(水島 寒月) 역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구샤미 선생의 옛 제자이자 이학자로 <목매닮의 역학>이라는 괴상한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가네다 도미코라는 여성과 결혼하겠다며 발버둥치더니,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가서는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하고 돌아오는 등 좀체 알 수 없는 행동을 이어간다.

도대체 그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우리는 대부분 삶을 살아가며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 혹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가령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속 개미들이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아마 그들이 바라보는 인간은 마치 걸리버 여행기 속 거인들처럼 거대할 것이며,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위협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인 고양이의 시각 역시 마찬가지. 우리가 평소 우스갯소리로 주인이라 말하는 고양이 역시 실제로는 우리를 무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저들은 대체 왜 일정한 시간에 급히 뛰쳐나가선 밤마다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지 모르겠다’며 딱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혹은 완전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철학의 오랜 담론 중 하나다. 서양의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불완전한 우리의 현실세계를 벗어난 완전한 곳, 즉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했다. 또한 근대 철학자 칸트는 우리가 결코 세계 자체를 알 수 없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마지막은 고양이가 인간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맥주를 잔뜩 마신 뒤, 물항아리에 빠져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평온함을 얻는다. 기쁜지고 기쁜지고’라는 그럴듯한 포장까지 해가며 말이다. 인간을 우습게만 본 고양이 역시 제 꾀에만 빠져 생을 마감한 것. 이 소설의 결말을 생각할 때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력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나 존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나 혹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위험과 어려움을 미리 알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