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국이 망 중립성 폐지에 돌입한 가운데 내년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꿈틀대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소속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실이 19일 국회에서 연  4차 산업혁명 시대 망 중립성의 미래 정책 토론회에서 통신사들은 망 중립성 정책의 변화를 주문한 반면 인터넷 사업자들은 네트워크 기본권 확대 기조는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망 중립성은 통신사와 같은 네트워크 사업자들이 서비스를 운용하며 특정 서비스와 콘텐츠 사업자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 신용현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출처=신용현 의원실

미국의 충격적인 망 중립성 폐지

미국은 지난달 아짓 파이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 주도로 망 중립성을 전격 결정했다. 지난해 12월 망 중립성 폐기안을 통과시킨 후 사실상 통신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셈이다.

미국은 망 중립성의 성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실리콘밸리 ICT 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당선된 후 이러한 기조는 더욱 강해졌다. 톰 휠러 FCC 위원장 시절 망 중립성은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상징했다. 변화는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에서 시작됐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높아진 반 실리콘밸리 정서에 힘입어 공화당이 FCC를 장악했고, 지난해 12월 위원들이 전격적으로 표결에 돌입해 3대2로 폐지를 결정했다.

실리콘밸리는 강력히 반발했다. 구글을 필두로 망 중립성 폐지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미적이던 애플도 지난해 9월 "오픈 인터넷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ICT 기업들은 망 중립성 폐지가 곧 자신들에 대한 규제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 중립성이 폐기되면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통신사(Internet Service Provider, ISP)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인터넷 콘텐츠 사업자들의 트래픽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플랫폼 장악력이 높아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혁신의 실종이다. 망 중립성이 폐지되면 제2의 구글이나 넷플릭스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12월17일 “글로벌 ICT 기업들이 망 중립성 폐지에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보도를 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망 중립성 폐지 논란이 불거질 당시에는 열성적으로 반대했으나 막상 망 중립성 폐지가 결정된 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망 중립성이 폐지되면 신생 인터넷 콘텐츠 사업자가 성장하기 어렵고, 이미 규모의 경제를 이룬 대기업들은 추격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다.

망 중립성 폐지가 오픈 인터넷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장면도 부담이다. 월드와이드웹(WWW)에서 시작된 오픈 인터넷 정책은 인터넷을 일종의 공공재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망 중립성은 인터넷의 활용을 좌우하는 ISP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해 '인터넷=공공재'라는 공식을 부정한다.

▲ 오픈 인터넷 정신 시위. 출처=갈무리

국내도 망 중립성 논란 '솔솔'

국내의 망 중립성 기조는 강화에 방점이 찍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네트워크 기본권 확대를 공약으로 걸었으며, 망 중립성을 지지하고 있다. 정부도 망 중립성 강화 기조는 큰 틀에서 변함이 없다.

관건은 5G 시대다. 내년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앞두고 통신사들 사이에서 망 중립성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9일 토론회에서 류용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KTOA) 팀장은 "망 중립성 강화가 통신사들의 망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면서 "미국도 이러한 우려가 있어 망 중립성 정책을 폐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트워크가 5G로 발전하며 필연적으로 망 투자가 벌어져야 하는데, 망 중립성 강화 기조가 기계적으로 이어진다면 통신사들의 투자 의지가 생길 수 없다는 논리다. 여기에는 네트워크, 즉 망을 책임지는 통신사가 단순한 파이프의 역할이 아니라 인터넷 기업처럼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사업자로 여겨져야 한다는 주장도 깔려있다.

망 중립성 강화 기조의 극적인 변화가 어렵다면 네트워크 슬라이싱과 같은 별도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네트워크 슬라이싱 기술은 하나의 망에 다양한 용도를 설정해 통신사들이 속도를 따로 조절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다. 5G 시대를 맞아 통신사들의 플랫폼 운용 능력을 올리는 한편, 제로레이팅까지 염두에 둔 전략적 포석이다. 김성환 아주대 교수는 "네트워크 슬라이싱같은 급행차선을 만들어 중소 사업자에게 개방하는 방법도 있다"는 제안도 했다.

인터넷 사업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차재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실장은 망 중립성이 약화되면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해 NYT가 지적한 '망 중립성 폐지에 따른 스타트업 성장 불가론'이다. 차 실장은 "국내 인터넷 사업자들은 이미 많은 비용을 통신사에 지불하고 있다"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글로벌 ICT 기업 역차별 논란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망 사용료 논쟁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다.

정부는 망 중립성 강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통신사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다. 김정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통신경쟁정책과장은 "정부는 망 중립성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는 수준"이라며 말을 아꼈으나 "정부가 네트워크 슬라이싱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막을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망 중립성에 대한 특별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망 중립성 강화를 유지하면서, 통신사들의 주장에도 '여지'를 남겨둔 발언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