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국 통신사 AT&T가 시도하고 있는 복합 미디어 그룹 타임워너 인수에 청신호가 켜졌다. <AP통신> 등 주요 외신은 12일(현지시각) 리처드 리언 미국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 판사가 미국 법무부의 인수합병 차단명령 청구소송을 기각했으며, 사실상 AT&T의 타임워너 인수를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인수대금만 850억달러 수준의 빅딜이다.

AT&T와 타임워너 합병은 최근 합의된 스프린트와 티모바일 합병과는 사업의 결이 다르다는 평가다. 통신사와 복합 미디어 기업의 전격적인 결합은 넷플릭스에서 시작된 미디어 시청 환경 변화의 근본적인 격변과 깊은 관련이 있다. 컴캐스트와 21세기 폭스, 디즈니와 아마존 등 다양한 사업자의 충돌이 얽힌 고차 방정식이다.

▲ AT&T가 타임워너를 인수한다. 출처=픽사베이

트럼프 몽니 이겨냈다...합병 청사진
 

AT&T의 타임워너 합병 시도는 2016년 10월 두 회사가 공식적으로 합병 사실을 알리며 시작됐다. AT&T와 함께 온라인 비디오 사업을 운영하는 미디어 산업의 전문가 피터 처닌(Peter Chernin)이 <CNBC>와의 인터뷰에서 “타임워너에게 AT&T 인수는 굉장히 매력 있는 일”이라는 운을 띄운 후 이뤄진 빅딜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가 불발되는 등 통신사와 콘텐츠 기업의 결합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라 특히 시선이 집중됐다.

AT&T가 타임워너 인수에 나서는 이유는 선명하다. 자사의 통신망을 통해 타임워너의 방대한 콘텐츠를 탑재해 그 자체로 시너지를 노리려는 의도다. 통신망을 활용한 플랫폼 사업자들의 존재감이 강력해지는 상황에서 자체 망을 통한 콘텐츠 역량의 연결을 바탕으로 통신사의 비전을 정조준한 셈이다.

타임워너도 남는 장사다. CNN, 워너브라더스, HBO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훌루의 지분 10%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량이 AT&T가 가진 통신망 경쟁력과 연결되면 나름의 시너지가 가능하다는 복안이다. AT&T의 통신망을 혈관에 비유한다면 타임워너의 역할은 혈액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를 꾸리겠다는 노림수다. 다양한 유료방송 플랫폼이 우후죽순 등장하며 케이블 시장의 성장동력도 크게 떨어진 것도 두 회사의 합병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독과점 규제에서 불거졌다. 합병 사실이 알려진 초기 버라이즌의 부채가 1000억달러를 넘어간다는 지적이 나와 AT&T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두 회사의 합병이 결정적으로 막힌 이유는 시장 독과점을 우려한 규제 당국의 행보에서 비롯됐다.

이례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두 회사의 합병에 반대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회사의 합병이 발표된 후 “권력이 너무 집중된다”는 말로 우려를 표했고, 법무부가 정식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됐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도 AT&T에 2016년 11월 9일 불평등 경쟁에 대한 우려가 담긴 서면을 보냈다. AT&T가 타임워너 콘텐츠에 의존하는 경쟁 케이블TV 회사에 횡포를 부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두 회사의 합병은 약 2년을 끄며 지지부진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기에 두 회사가 합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냉소적인 반응까지 나왔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가 세기의 빅딜로 여겨지던 브로드컴과 퀄컴 합병을 반대하는 등 거대 기업의 합종연횡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AT&T의 타임워너 인수는 더욱 난망하다는 말이 나왔다.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두 회사가 법원의 합병승인을 끌어낸 셈이다.

독과점에 대한 법원의 전격적인 판단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리언 판사는 경쟁 케이블 TV 사업자에 대한 횡포 가능성은 물론, 가입자의 요금이 비상식적으로 올라갈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20일 두 회사의 합병이 성사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버라이즌의 콘텐츠 행보도 눈여겨 볼 포인트다. 출처=픽사베이

플랫폼과 콘텐츠의 만남

AT&T와 타임워너 합병은 2011년 컴캐스트가 NBC유니버셜을 인수하고 2017년 버라이즌이 야후를 손에 넣었던 사례와 일맥상통한다. 콘텐츠 업계의 격변이 벌어지며 플랫폼 사업자와 콘텐츠 사업자가 결합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는 결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특히 버라이즌의 전략에 시선이 집중된다. 버라이즌은 야후를 손에 넣기 전인 2015년 AOL(아메리카온라인)을 전격 인수했다. AOL은 <테크크런치>, <허핑턴포스트>, <엔가젯> 등을 거느린 종합 콘텐츠 기업이며 버라이즌은 AOL을 철저하게 광고 플랫폼 강화에 활용했다. IT매체 <수가스트링>을 인수했으나 직접적인 콘텐츠 사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버라이즌이 자사 플랫폼 강화를 위해 AOL이라는 외부 콘텐츠 전문가 집단을 끌어들여 생태계 강화에 나섰고, 통신사의 탈통신 기조를 이어가며 야후의 콘텐츠 전반을 빨아들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콘텐츠와 플랫폼의 유기적인 결합이다. AT&T의 타임워너 인수와 동일하다.

더 내밀한 분석을 시작하면, 콘텐츠와 플랫폼이 만나는 이유부터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버라이즌이 AOL와 야후를 인수하고 AT&T가 돌고 돌아 타임워너 인수에 속도를 내는 이유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플랫폼 사업자인 통신사 측면에서는 역시 사업 확장성이 떨어지고 있는 점이 중요한 원인이다. 네트워크 사업자로 활동하기에 5G 초연결 시대는 지나치게 ICT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통신사와 구글, 넷플릭스 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망 중립성 논쟁이나 제로레이팅 이슈는 통신사의 외연 확장을 어렵게 만들며, 자연스럽게 탈통신 기조를 강제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통신업계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현상이며, 버라이즌과 마찬가지로 AT&T도 이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카드로 콘텐츠를 점지한 셈이다.

▲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HBO의 간판 드라마다. 출처=픽사베이

콘텐츠, 특히 케이블 TV 사업자인 타임워너도 통신사 AT&T와 만나 신선한 시도를 할 수 있다. 당장 합병이 성사되면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한 HBO, 정통 뉴스 채널 CNN을 보유한 타임워너에 AT&T 1억1900만명의 인터넷 가입자가 가세한다. 필요에 따라 모바일 시장에서 AT&T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플랫폼 상품을 자유롭게 출시할 수 있을 전망이다.

최근 케이블TV 업계가 어려움에 직면한 점도 버라이즌과 AT&T의 만남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른바 코드커팅(유료방송, 특히 케이블TV 회선을 중단하는 일)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지며 케이블TV 사업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AT&T의 플랫폼 경쟁력과 막대한 가입자는 버라이즌의 미국 케이블TV 시장 장악에 속도를 붙이는 한편 그 이상의 시너지를 창출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