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에 있는 월스트리트는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약 여덟 구역의 도로 이름이다.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뉴욕의 초기 정착자인 네덜란드인들이 뉴욕을 식민지로 개척했을 당시, 뉴욕을 넘보던 영국인들과 기존에 있던 원주민들을 막기 위해 쌓아올렸던 나무로 된 울타리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뉴욕을 식민지로 건설한 네덜란드인들의 영향으로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초기 단순하게 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졌던 담은 이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튼튼하게 높은 요새처럼 다시 지었다.

이즈음부터 월스트리트 인근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채권이나 주식을 팔고 사는 시장이 열렸고 노예들을 당일이나 1주일 기간으로 고용하는 인력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1640년대부터 1650년대까지 세워진 이 방책은 영국이 1699년 철거했으며 1711년 월스트리트는 뉴욕의 첫 공식적인 노예거래시장으로 바뀌었다.

1711년부터 1762년까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과 원주민 노예들은 월스트리트에 나무로 지어진 5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매매가 이뤄졌다.

뉴욕시는 노예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노예 1명당 세금을 부과해서 이를 거둬 수익을 얻었다.

월스트리트는 주식거래 시장이기 이전에 노예시장으로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1792년 증권 브로커들과 투기꾼들이 버튼우드 나무 아래 모여서 제 살 깎아먹기식 고객 확보를 하지 말고 수수료도 어느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담합을 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버튼우드협약(Buttonwood Agreement)’다. 버튼우드 협약은 이후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드는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주식거래소인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는 1817년에 독립 건물로 옮기면서 탄생했다.

월스트리트는 주택가와 상업지역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점점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1840년과 1850년대를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미드타운 쪽으로 이주해나갔다.

1884년 당시 ‘소비자의 오후 레터(Consumers’ Afternoon Letter)’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던 신문의 편집장인 찰스 다우(Charles H.Dow)가 뉴욕증권시장에 상장된 주식 가운데 가장 신용 있고 안정된 30개 종목을 표본으로 만든 다우지수를 선보였다.

이 뉴스레터는 1889년 뉴욕증권거래소가 있는 거리의 이름을 따서 <월스트리트저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후 1914년에 JP 모건의 본사가 월스트리트에 지어지는 등 월스트리트는 본격적으로 세계 금융의 심장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은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금융시장을 지칭하는 말로 바뀔 정도였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굳이 대면 주식거래를 위해서 관련 기업들이 같은 지역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졌고, 2001년의 9.11 테러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임시 이전했던 금융회사들이 점차 월스트리트를 떠나게 됐다.

강 건너인 뉴저지와 맨해튼의 미드타운 등으로 흩어졌던 금융기관들은 최근 들어 새롭게 만들어지는 허드슨야드로 모여들면서 제2의 월스트리트가 생겨나고 있다.

허드슨야드는 맨해튼의 기차역 펜스테이션을 오가는 철도차량의 기지로 맨해튼 서쪽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이 공간을 상업공간과 주거공간이 합쳐진 복합업무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키면서 월스트리트의 대체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3대 사모펀드인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가 본사를 옮기기로 한 데 이어 세계 최대의 자산 운용사인 블랙록이 미드타운의 파크 애비뉴를 떠난 허드슨야드로 옮기기로 했다.

헤지펀드업체인 포인트72애셋과 서드포인트, 실버레이크 등도 본사를 이전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컨설팅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과 언스트&영의 본사, 미국 3위 은행인 웰스파고, 경영 소프트웨어 업체인 SAP 등도 허드슨 야드로 입주를 확정함으로써 월스트리트는 이제 지명이 아닌 상징적 ‘금융중심가’의 이름으로만 남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