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에 따르면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은 2021년 350억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모바일 시대에서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며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트렌드가 시작된 가운데, 업종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기업들이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특히 많은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하드웨어 기술의 결정판인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석권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인공지능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의 영역에 포함되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인텔의 인공지능 반도체는 바닷가재 수준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출처=인텔

인텔부터 알리바바까지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와 시스템으로 나뉘며, 메모리 반도체는 D램과 낸드플래시가 핵심이다. 이 분야는 삼성전자가 점유율 기준으로 D램과 낸드플래시 1위에 올라 있으며 SK하이닉스가 D램 2위, 낸드플래시 5위에 이름을 올리는 등 반도체 코리아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다만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존재감이 흐릿하다. 인공지능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의 영역이다.

인텔은 로히리를 전면에 걸었다. 지난해 10월 일부 공개된 로히리는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자율학습 인공지능 반도체를 표방하며 14나노의 공정으로 제작됐다. 13만개의 뉴런과 1억3000만개의 시냅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존 인공지능 신경망과 비교해 100만배 높은 학습률을 자랑한다는 설명이다. ‘뉴로모픽 컴퓨팅(Neuromorphic Computing)’을 실현할 수 있는 인공지능 반도체다.

클라우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다. 반도체 스스로 공부하고 작업할 수 있는 기능을 바탕으로 타사의 클라우드 존재감을 경계, 독립적인 인공지능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인텔은 “로히리의 기술력은 바닷가재 수준의 지능을 구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스템 반도체의 왕자 퀄컴과 영국의 ‘암’ 등 많은 제조사들도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인공지능의 왕 엔비디아는 물론,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도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퀄컴은 스냅드래곤 시리즈에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을 연결하며 입지를 강화하는 중이다.

이외에도 많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도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인텔과 퀄컴 등이 장악한 반도체 시장에 인공지능 전용 반도체를 내세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도전하고 있다면서 “초연결 인공지능 반도체의 제작은 기존 반도체와 다르기 때문에 재능 있는 스타트업에게도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전통의 반도체 제조사만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화웨이는 지난해 9월 모바일 인공지능 반도체인 기린 970을 공개했다. 프리미엄 스마트폰 메이트10에 처음 장착됐으며 옥타코어(8-Core) 중앙처리장치(CPU)와 12개의 차세대 GPU 코어로 구동되며, 10 나노 공정 신형 프로세스를 활용한 제품이다. 클라우드 인공지능에 온 디바이스(On Device) 플랫폼을 구현했다는 후문이다. 기존의 클라우드 기반 인공지능 대비 한층 빠르고, 전력 소모가 적으며, 보안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 화웨이 모바일 AP인 기린970의 개요도. 출처=화웨이

NPU(Neural Network Processing Unit, 신경망프로세서유닛)가 적용된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 시스템온칩(System-on-Chip, SoC)이며 분당 2000장의 이미지를 처리해 경쟁사에 비해 약 5배 빠른 속도를 보이고 6초 만에 200장의 사진을 인식해, 120초가 걸리는 CPU 대비 약 20배 빠르다.

샤오미도 자체 모바일 AP인 Surge S1을 지난해 2월 공개했다. ARM ‘코어텍스(Cortex)-A53’ 기반 옥타코어 64비트 프로세서를 지원하며 28나노 기반이다. GPU는 ARM ‘말리(Mali)-T860 MP4’다. 최초로 탑재하는 스마트폰은 미5C며, 중저가 기반의 모바일 AP 시장을 노리고 있다.

애플도 아이폰X를 통해 A11 바이오닙을 도입해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 진출을 알렸다. 아이폰의 모바일 AP인 A 시리즈에 처음으로 인공지능 기술력이 포함된 셈이다. 애플은 마지팬 프로젝트, 즉 iOS와 맥 운영체제의 통합을 위한 정지작업을 통해 사용자 경험의 확대를 노리고 있다. 다만 마지팬 프로젝트가 폐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마지팬 프로젝트에 회의적”이라는 말로 두 운영체제의 연결에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 애플 아이폰X에도 자체 인공지능 반도체가 들어갔다. 출처=애플 코리아

제조사를 넘어 소프트웨어 회사들도 속속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구글은 이미 픽셀2 스마트폰에 자체적으로 제작한 인공지능 반도체를 탑재했으며, 아마존은 인공지능 스피커 알렉사에 자사 인공지능 반도체를 탑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심지어 페이스북도 나섰다. <블룸버그>는 4월 19일(현지시간) 페이스북이 자체 반도체 설계 팀을 꾸리는 한편, 이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페이스북은 최근 자회사인 오큘러스를 중심으로 하드웨어 전략을 가다듬고 있으며 가상현실을 망라하는 오큘러스를 통해 소셜 네트워크의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의 오프라인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다. 그 연장선에서 자체 인공지능 생태계를 구성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알리바바도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다. 중국 반도체 설계회사 중톈웨이 시스템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인공지능 각축전에 뛰어들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 중 하나인 중국의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단숨에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 페이스북도 자체 인공지능 반도체 제작에 뛰어들었다. 출처=페이스북

키워드는 '의존도 탈피'

글로벌 반도체 시장, 특히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강자는 인텔이다. 그러나 최근 인텔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강자인 삼성전자에 밀리고, 모바일 AP를 중심으로 하는 홈그라운드인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퀄컴 등에 뒤를 잡히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에서는 시장의 패권이 엔비디아로 거의 넘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텔과 같은 전통의 반도체 업체들이 인공지능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노리는 이유는 엔비디아와 같은 다크호스를 견제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흥미로운 키워드는 ‘의존도 탈피’다. 삼성전자가 엑시노스 시리즈를 통해 인공지능 기술력을 탑재하는 이유 중 하나도 ‘타 기업의 의존도 탈피’다. 화웨이와 샤오미도 퀄컴 등에 모바일 AP 경쟁력을 크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빠르게 자체 생태계 조성으로 돌아서고 있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의 패권이 인공지능 시대를 거치며 엔비디아 등으로 넘어오고 있으나, 이들로부터 반도체를 수급받는 제조사들은 엔비디아마저도 탈피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페이스북과 알리바바 등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독자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의존도 탈피에 더욱 적극 나서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가 미래의 대세로 부각된 만큼 독자 생태계를 꾸리면 운신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알리바바의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 진출이 미국의 중국 ZTE에 대한 제재가 발표된 직후 나왔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중요한 미국 시장의 불완전성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활로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이 커질 경우 파운드리 사업체들의 호황이 예상된다. 현재 대만의 TSMC가 파운드리 1위를 달리는 가운데, 삼성전자도 맹추격을 시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