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동우 기자] 삼성물산에 이어 현대자동차까지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표적이 되면서 재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상장사들이 경영권 방어수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 투기자본과 단독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경영간섭이 지속된다면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안 역시 실효성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에 따르면 엘리엇은 지난 4일 10억달러(약 1조500억원) 규모의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매입했다고 밝히며 “현대차가 회사와 이해 관계자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차를 노리는 헤지펀드 ‘엘리엇’

현대차는 지난 3월 28일 순환출자 해소, 대주주 책임 및 투명경영 강화, 완성차 사업경쟁력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다. 그동안 꾸준히 지적돼왔던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어내는 동시에 일감 몰아주기 이슈에서 회피하고 정의선 부회장의 후계구도를 완성하겠다는 의도다.

엘리엇은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추가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엘리엇은 “우리는 기업 지배 구조개선, 대차 대조표 최적화와 각 회사의 자본 수익률 증가 방법에 대한 로드맵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엘리엇의 주장은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림수로 풀이된다. 엘리엇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는 현대차의 대응에 따라 행동에 나서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현대차가 제시한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더 많은 배당을 요구하며 현대차의 분할·합병에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 폴 싱어 엘리엇 매니지먼트 회장. 사진=위키커먼스

지배구조 개편안의 핵심인 현대모비스의 외국인 지분율은 48%다. 5월 인적 분할 및 합병안이 주총에서 통과되려면, ‘의결권 있는 출석 주주 3분의 2 이상 동의와 발행주식 총수 3분의 1 이상 참석·동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엘리엇이 주주가치 극대화를 명분으로 외국인 주주들을 동원해 현대차를 압박한다면 현대차 역시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차는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분쟁에서 삼성의 기회비용을 지켜보았기에 이를 반면교사로 엘리엇 제안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소액주주의 의결권 영향력이 높아지는 상황이고 오랜 기간 현대차의 실적 부진을 지켜본 해외 주요 주주는 주주 권익을 내세운 엘리엇에 동조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국내 상장사, 경영권 방어수단 없다

엘리엇은 대표적인 행동주의 투자(Activist Investment) 헤지펀드다. 행동주의 투자자는 수익률 확보를 위해서 주주로서 경영권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350억달러(약 37조790억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엘리엇 역시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구매한 뒤 자회사의 매각과 구조조정 등을 요구를 하며 국내외 상장사들을 대상으로 경영간섭을 해왔다.

그러나 투기자본에 맞서야 하는 국내 상장사에게는 경영권 방어수단이 전무하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금융당국이 외국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분으로 기업들의 주요 경영권 방어수단을 폐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1997년 대량주식 소유제한이 폐지된 데 이어 1998년에는 외국인의 국내 기업 주식 10% 이상 취득 시 이사회 동의 요건 등이 사라졌다.

반면 포이즌 필(Poison Pill)과 차등 의결권 도입 등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포이즌 필은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으면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82년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하고 투기자본으로부터 자국의 기업을 보호하고 있다.

차등 의결권은 적대적 지분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 주식에 특별히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차등의결권 제도 역시 미국과 유럽,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도입하고 있다.

 

외국계 투기자본, 한국 기업 흔들기 ‘잔혹사’

삼성물산은 지난 2015년 엘리엇과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엘리엇은 우호지분을 포함해 삼성물산의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하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1대 0.35)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 치열한 표 대결 끝에 삼성물산은 주총에서 합병을 성사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직원들은 소액주주들을 직접 찾아가 위임장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엘리엇은 2016년에도 삼성전자의 지분 0.6%를 확보한 뒤 지주회사 전환과 나스닥 상장, 30조원 특별 배당을 요구했다. 삼성전자는 엘리엇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자사주 49조3000억원 어치를 소각했다. 당시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연구·개발(R&D) 투자에 들어갈 자금이 주주 가치제고에 사용됐다고 평가한 바 있다.

지난 2003년 SK(주) 지분 14.99%를 매입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선 외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퇴진과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하며 경영간섭을 시작했다. 이어 자신들이 추천한 사외이사 후보를 내세워 기자회견을 하고 임시 주주총회에서의 표 대결로 몰아간다.

위기감을 느낀 SK그룹은 1조원의 자금을 투입해 방어전에 나섰고 주가가 뛰자 소버린은 지분을 5만2700원에 팔고 7559억원의 투자차익을 거둔 뒤 한국을 떠났다. 당시 배당금과 환차익까지 고려하면 소버린이 챙긴 돈은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도 지난 2006년 헤지펀드 칼 아이칸은 스틸파트너스와 함께 KT&G 지분 6.59%를 사들인 뒤 자회사 매각을 요구했다. 이 경영권 분쟁은 10개월이나 지속됐고 칼 아이칸은 배당금과 투자차익 등을 통해 1500억원을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