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허지은 기자] 2003년 재계를 공포에 떨게 한 이름이 있다. 영국계 자산운용사인 소버린자산운용 얘기다. 소버린은 당시 국내 최대 정유회사였던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의 지분을 14.99%까지 매입하며 1대 주주로 등극했다. 매입 가격은 주당 9293원, 보유주식은 1902만8000주였다. 총 1689억원으로 자산 규모 17조원을 넘은 SK의 최대주주가 된 것이다. 외국자본이 국내 대기업의 최대 주주로 올라선 최초의 사례였다.

1대 주주로 올라선 소버린은 SK와 본격적인 경영권 전쟁에 돌입했다. 주총을 앞두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포함한 사외이사들이 대거 물갈이를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SK그룹 경영권 분쟁은 소버린의 완패로 끝났으나, 소버린은 2005년 7월 보유지분 전량을 처분하며 9437억원의 차익을 얻고 한국을 떠났다. 최대주주가 된 지 불과 2년 4개월 만이다. 기업사냥꾼의 ‘먹튀’에 한국 기업이 맥없이 당했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지난 2015년에는 ‘제2의 소버린’으로 불린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등장한다. 엘리엇은 당시 경영참여를 목적으로 삼성물산 지분을 대량 매입했다. 우호지분까지 합친 엘리엇의 삼성물산 지분은 11.78%. 엘리엇은 지분을 앞세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표를 던졌다. 2016년에는 삼성전자 주식 0.62%를 매입해 30조원의 특별배당과 삼성전자 분할, 지주회사 전환을 요구했다.

삼성의 심장부를 정조준했던 엘리엇은 2018년 현대차로 목표를 바꿔 다시 등장했다. 대상만 달라질 뿐이지 해를 바꿔가며 기업 사냥꾼은 한국 재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국내에도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재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는 이유다.

포이즌 필·차등의결권, 미국·일본·프랑스 등주요 선진국 시행 중

포이즌 필(Poison Pill)이란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 매수가 가능한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을 침해당하는 경우에 기존 주주들이 더 싼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어 지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매수기업의 입장에서는 매수 시도가 막힐 수 있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 있어 포이즌 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포이즌 필은 현대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시행 중이다. 일본은 2005년 신주예약권이라는 일본식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했다. 2007년까지 일본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 10%가 넘는 기업들이 신주예약권제도를 도입했으며 최근까지도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은 증가 추세다. 미국 역시 소더비, 허츠, JC페니, 세이프웨이, 아메리칸어패럴, 에너자이저 홀딩스 등 많은 기업들이 포이즌 필로 경영권 방어에 나서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대주주나 경영진의 보유 지분에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차등의결권 제도가 도입되면 한 주 만으로도 주주총회 의결사항에 절대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도 발행할 수 있게 된다. 차등의결권은 경영진이 지분율을 희석시키지 않고도 외부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차등의결권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국 대부분에서 시행하고 있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은 주식을 주당 1표의 의결권을 갖는 보통주 A형과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밋 등 공동 창업자가 보유한 B형으로 나눴다. B주에는 주당 10표의 의결권이 부여돼 A형보다 10배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페이스북과 링크드인, 질로우(Zillow) 역시 주당 10표를 얹은 B주를 발행하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페이스북 B주의 85%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소셜게임회사인 징가는 A주보다 7배 많은 의결권을 부여한 B주와 70배 많은 의결권을 부여한 C주 등 3단계 주식을 발행하고 있다. 마크 핑커스, 저스틴 월드론, 앤드류 트레이더 등 창업자들은 C주의 61.0%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형 포이즌 필 도입해야” Vs “대주주 배만 불리는 격”

우리나라는 적대적 M&A 시도가 발생하면 ▲주주총회 소집을 통한 재무구조 개편이나 주요 자산 매각 ▲회사 분할을 비롯한 자산 구조조정 ▲자기주식의 취득 한도 확대 등의 방어 장치가 있다. 또 집중투표제 배제, 이사 수 축소, 시차임기제 도입, 제3의 우호세력에 대한 신주나 전환사채 발행 허용, 황금낙하산 전략 등의 방어 수단을 정관에 넣을 수 있다.

재계에서는 보다 강력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계 투기자본의 위협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며 “선진국에는 없는 규제 때문에 기업들은 투자비용에 쓸 돈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 2015년 보고서를 통해 “국내 우량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투기자본에 의한 적대적 M&A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 등에서 활용하고 있는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2009년 상법 개정 시 논의된 한국형 포이즌 필 제도 도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차등의결권의 경우 주주 간 평등권을 지나치게 침해할 수 있으며 황금주 역시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포이즌 필 역시 건전한 M&A를 저해할 수 있으며 자칫 대주주의 돈 챙기기에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이즌 필은 지난 2009년 국회의 반대로 도입이 무산된 뒤 제대로 된 논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8년 법무부가 경영권방어법제 개선위원회를 구선한 뒤 이듬해인 2009년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됐으나, 오너 일가 등 재벌 기업의 경영권 유지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시민단체의 반발과 정치권의 지적이 이어지며 논의는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