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터 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신림동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신림동 고시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 칼럼 속 교육의 터가 고3 수험생에 입각한 곳이었다면, 이번 터는 대학생들이 준비하는 고시의 터이며 인재가 배출되는 터이다. 고시촌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1980년대 초다. 산업화에 따른 국가성장에 힘입어 과거 장원급제를 연상케 하는 시험이 바로 고시였다. 80년대 흔히 말하는 3대 고시가 있었으니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였다.

과거 고시에 합격하면 시골에는 잔치가 열리거나 현수막이 걸릴 정도로 서민에게는 하나의 신분상승의 길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대학인 서울대학교가 1975년 신림9동으로 이전하면서, 신림동은 고시생들의 밀집 거주지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터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명소가 있는데 첫 번째로 서울대학교, 두 번째로 고시촌인 신림9동, 마지막으로 관악산이다.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의 대표 대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림동 고시촌을 논하기 전 관악산을 먼저 살펴보자. 관악산(冠岳山)의 이름은 갓을 쓴 큰 산이라는 뜻이다. 유독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많고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이 갓처럼 보여 이름을 관악이라고 했다고 한다. 유래의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법적 지명으로 최초 고시는 1968년 1월 15일이다. 서울대가 이전하기 전부터 이렇게 불린 것을 보면, 풍수가나 작명가가 기운을 읽어 이렇게 작명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우연이라 하더라도 갓을 쓴 터에 70년대부터 서울대학교가 이전하고 80년대부터 고시촌이 형성된 것은 관악산의 이름과 풍수가 갖는 운명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 관악산은 끝 봉우리가 뾰족하게 솟아 풍수기법 중 하나인 오행론(五行論)으로 보면 불의 모습이라서 불산(火山)이다. 그 기운이 수도를 향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광화문 앞에 바다의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하고 관악산 봉우리에는 연못을 만들어 물(水) 기운으로 눌렀다. 특히 산 정산인 영주대(靈珠臺)는 세조(世祖)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관악산의 산세는 힘이 있고 뾰족하다.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특히 많고 산 자체도 바위가 갖는 기운이 강하다. 그리고 간룡법으로 산세를 보면 용이 굽이치듯 움직이는 산세다.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기운을 가진 기운이 이어져 내려오는 곳이 바로 신림동 고시촌이다.

신림9동은 관악산의 정기가 관통하는 직접적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거의 형태가 밀집되어 있다. 공부를 하는 터여서인지 신림동에는 북적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어딘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흔한 말로 ‘구석에 처박혀’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림동 고시촌엔 나름의 권력과 서열이 있다. 오랫동안 고시를 공부한 고시낭인들은 전문강사들을 평가하고 신림동이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알아 신입 고시생에게 나름의 권위가 있다. 이들은 긴 수험기간 동안 가족들과 왕래도 끊긴 채, 그들만의 장소에서 저렴한 물가의 혜택을 바닥 삼아 달콤한 고시낭인의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렇게 80년부터 시작된 고시촌은 2000년 이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사법시험의 폐지다. 외무고시나 행정고시도 과거의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 인재를 영입하고 선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신림동 고시촌은 선비들의 아지트로써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3대 고시는 아니더라도 출세의 지름길이 아닌 안정된 생활로써의 길로 공무원을 선택해 고시를 준비하는 선비들로 분주하다.

반드시 신림동에서 공부해야 선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악산의 정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받고 있는 신림동의 터는 분명 공부의 기운을 가진 터로 빼놓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쉽게 그 기운이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