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 국내 오픈마켓 '3대장' 으로 불리는 업체들. 출처= 각 사 

잠재력 최강의 이커머스 ‘콩라인’

SK플래닛의 오픈마켓 11번가는 국내 이커머스에서 아주 전형적인 ‘콩라인(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1등이 되지 못하는 2등을 이르는 말)’이다. 2008년 2월 창립한 SK그룹 유일의 커머스 계열사 11번가는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의 확장에 힘입어 가장 눈부신 성장세를 보여준 업체였다. 선발 주자인 G마켓이나 옥션보다 시작은 약 5~10년이 늦지만 최근 몇 년간 시장 점유율이 업계 1위인 G마켓과 한 자리 수 차이로 1·2위 자리를 다툴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G마켓은 공공연하게 ‘오픈마켓 업계 1위’라고 밝히는 반면 11번가는 아직까지 그렇게 자기들의 위상을 대외에 공표하지 못하고 있다.  

11번가, 롯데·신세계와 ‘밀당’하다

11번가라는 이름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은 2017년이었다. 지난해 11번가는 국내 유통업계를 대표하는 맞수 기업 롯데와 신세계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인수 제안)을 받았다. SK플래닛이 11번가 매각을 두 업체와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의’가 사실로 밝혀지기 전까지 11번가는 이 사안과 관련한 모든 것을 함구했고 업계에서는 특정 업체의 인수가 임박했다는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이러한 추측은 사실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있었다. 11번가가 속한 SK플래닛은 2016년 3652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적자 중 대부분이 11번가 운영에 쓰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투자은행(IB) 업계는 11번가의 존폐여부를 묻기도 했다. SK플래닛은 11번가를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롯데 혹은 신세계의 인수 확정 ‘설’은 더욱 힘을 받았다.

이 와중에 SK플래닛, SK텔레콤은 연달아 “11번가 매각은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 마치 롯데와 신세계를 두고 ‘밀당’을 하는 구도가 만들어졌고, 이는 당시 유통업계에서 최고의 관심거리가 됐다. 결국 인수 세부 조건에서 의견 차가 있어 인수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이전의 ‘설’들은 ‘설’로 남았다.  

업계 ‘최강’ 잠재 인프라

지난해 인수설로 11번가는 잠시 동안 ‘그저 그런’ 업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는 오산이다. 최근 이커머스업계의 상황과 SK라는 기업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롯데와 신세계가 노릴 만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11번가는 탄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2015년~2016년 국내 이커머스 업계는 치열한 ‘출혈 경쟁’을 벌였다. 어떤 업체들은 필수 소비 품목의 가격 경쟁력을 갖췄고 어떤 업체들은 할인 쿠폰으로, 또 어떤 업체들은 배송 서비스를 강화해 고정 고객들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소비자들은 상품을 싸게 사면서도 빠르고 편하게 배송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업체들의 과도한 마케팅 비용 지출로 업계 전체는 약 1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떠안았다. 그럼에도 결국 국내 온라인 마켓의 서비스는 전체로 상향평준화됐다는 결과를 낳았다.

▲ 출처= SK플래닛

이 상황에서 글로벌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 검색거인 구글이 이끄는 글로벌 이커머스 트렌드는 음성인식을 활용한 인공지능, ‘보이스 퍼스트(Voice First)’를 향했다. 국내에서는 이것이 통신-IT업체들의 스피커 형태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11번가는 경쟁 이커머스 업체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주변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모기업인 SK가 통신과 IT(SK텔레콤), 방송(SK브로드밴드), 반도체(SK 하이닉스) 등 첨단기술 사업체들을 보유하고 있고, 인공지능 스피커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11번가에게 엄청난 기회다. SK가 다른 계열사들이 보유한 인공지능, 음성인식 기술을 11번가의 전자상거래에 접목하면 전자상거래에만 집중한 경쟁업체들이 절대 단기간에 따라올 수 없는 간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외국계 이커머스업체의 관계자는 “인공지능, 음성인식 기술의 전자상거래 적용은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혁신”이라면서 “그러한 관점에서 SK텔레콤의 방대한 고객 빅데이터와 음성인식 기술은 분명 11번가에게 매우 좋은 활용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11번가의 잠재적 성장 조건은 다른 업체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좋다. 그러나 일련의 조건들이 11번가의 경쟁력이 되기 위해서는 ‘SK의 의지’라는 전제가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 즉, 좋은 조건들을 11번가를 위해 활용해 줄 수 있는 그룹의 결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커머스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매각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11번가에 대한 SK의 투자 의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SK는 자사가 가진 여러 기술을 활용해 많은 것들을 시도했으나 업계의 변화를 이끌 만큼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SK텔레콤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옥수수’나 마일리지 서비스 ‘OK캐쉬백’, 간편결제 서비스 ‘시럽페이’ 등은 공개 당시에는 주목을 받았으나 현재는 SK계열 플랫폼에 국한된 서비스로 머물러 있다.

온라인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SK는 반도체 계열사 SK하이닉스와 화학 계열사 SK이노베이션이 일궈내는 대내외의 성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단기간의 투자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확인할 수 없는 11번가를 위해 SK가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지원을 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이커머스의 흐름을 볼 때 11번가는 분명 국내 이커머스 업계에서 가장 무섭게 성장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을 성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선택은 SK 그룹의 몫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