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ndscape, 90×160㎝ stone powder on korean paper, 2017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기형도 시, 밤 눈, 문학과 지성사 刊>

동해바다 뭉게구름 흘러간다. 하얗게 부서지며 모래알로 스며들다 되돌아가는 물의 자취. 살아간다는 것도 그렇게 지워지는 듯 스미어 자국을 남기고 마침내 견디는 힘이 되는 것인가. 짙푸른 립스틱 입술로 다가와 마침내 뭍에 이르러 아릿한 감촉으로 스치는 포말처럼 물의 사랑은 언제나 긴 여운을 남길 뿐이었다.

 

▲ 50×50㎝

 

그러나 어찌하랴. 그리움이란 것은 또 언제나 밀물처럼 그렇게 거대한 물결을 배후에 두고 소리 없이 밀려드는데. 물은 그저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강둑과 산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 억겁세월 더욱 견고해 진 퇴적의 암석들이 역류의 물살에 회오리치는 잔 흙들을 모아 마침내 자그마한 섬을 생산했다. 그곳은 궁극의, 강물의 쉼터였다.

그곳에서 물은 천천히 흐르며 새들을 부르고 풀잎을 키운다. 하얀 털로 제 꽃 싹을 감싸던 갯버들은 눈 내리는 날이면 하늘거리는 가지에서 미묘하게 은빛이 감돌았다. 그 빛깔이 강물에 드리워지고 하염없이 부유하듯 떨어지는 진눈개비와 어우러지면 그 작은 섬은 흐릿한 황혼을 껴안으려 애썼다. 먹이를 찾아 나온 다람쥐가 눈 숲에서 그 광경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72×60㎝

 

◇새 한 마리 위무의 노래

격정과 고요의 눈발이 전 속력으로 달려 나가듯 하얀 회오리를 남기며 나무들 사이를 빠져 나간다. 날카로운 통증의 소리가 휘몰아쳤다. 가는 허리의 아직은 어린 나목들이 무방비 상태로 냉기와 마주했다. 그 바람의 질주는 결국 산으로 거슬러 올라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계곡을 타며 종횡으로 몸부림치다 제 풀에 꺾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고요가 찾아 왔다. 눈밭에 쏟아지는 경쾌한 햇살위로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Jascha Helfetz)가 연주한 막스 브루흐(Max Bruch) 바이올린 협주곡 1번(Violin Concerto No.1, Op.26)이 흐른다. 바람의 끝자락에 따라오던 몇 눈송이들이 손안으로 떨어진다.

 

▲ 90×160㎝

 

‘오오 이렇게 여린 몸으로 저 대양(大洋)의 거친 풍랑을 건너오다니!’라고 독백한다. 선율에 얹힌 촉촉한 자국이 아련히 잠들어있던 기억의 영상과 오버랩 된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온다. 뜨거운 레몬잎차가 은은하고 알싸한 풍미를 입안에 남긴다.

하연수(ARTIST HA YEON SOO)작가는 이렇게 메모했다. “어느새 추억의 웅덩이처럼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새겨지고 슬픔의 세월이 지난 뒤 고백의 슬픈 끝자락에 나부끼는 애잔한 그리움처럼 나뭇가지에서 새 한 마리가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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