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조재성 기자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회사는 대체로 무얼 추구할까.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생산성 극대화'로 요약할 수 있겠다. 혁신 기술과 서비스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려 한다. 물론 모든 회사가 같은 생각이진 않다. 심지어 정반대 가치를 추구하는 회사도 존재한다.

"정말 훌륭한 게임을 만들어 전세계인의 생산성을 파괴하자! 이게 우리 목표입니다." 이 정도면 도발이다. 이단아라 부를 수 있겠다. 당당하게 목표 지향점을 밝힌 사람은 윤태원 슈퍼이블메가코프 글로벌 퍼블리싱 총괄(이사). 실리콘밸리로 출근하는 한국인이다.

슈퍼이블메가코프는 모바일 MOBA(적진점령 게임) '베인글로리'를 개발한 글로벌 게임사다. 본사가 실리콘밸리에 있다. 지난 11월 부산에서 방한한 윤 이사를 만났다. "어떻게 게임으로 생산성을 파괴할 계획인가요?"

 

'모바일+블록버스터+하드코어' 게임시장 지형도 바뀐다

서울대를 졸업한 윤 이사는 이력이 돋보인다. 일렉트로닉아츠나 블리자드 같은 글로벌 최정상 게임사에서 일했다. 지금은 슈퍼이블메가코프 글로벌 퍼블리싱 총괄이다. 게임 개발 외에 사업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회사에 합류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슈퍼이블메가코프엔 윤 이사 외에도 라이엇게임즈나 록스타게임즈 등 일류 게임사 출신이 많다. 크리스티안 세거스트라일 CEO는 슈퍼셀 출신이다. 그들은 왜 글로벌 최고 게임사에서 스타트업 개발사로 이직했을까. 윤 이사가 회사를 옮긴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말했다. "향후 모바일이 콘솔이나 PC와 대등한 플랫폼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존 인기를 끌던 캐주얼 게임 대신 블록버스터 하드코어 게임이 모바일 시장을 주도한다고 봤죠. 마침 슈퍼이블메가코프가 저랑 같은 생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더군요."

슈퍼이블메가코프가 출시한 게임은 베인글로리 딱 하나다. 2년 넘게 이 게임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신작을 양산하기보단 마스터피스(Masterpiece)를 지향하며 베인글로리를 끊임없이 보완해나가는 중이다.

▲ 사진=조재성 기자

베인글로리 장르는 MOBA. 한국 게이머에겐 '리그오브레전드'로 기억되는 장르다. "MOBA는 축구 같아요. 축구는 규칙이 간단하잖아요? 공을 차서 상대방 골대에 넣어야 하죠. MOBA도 간단합니다. 상대편 기지를 부숴야 이깁니다. 규칙은 심플하지만 막상 게임을 하면 축구든 MOBA는 무한대에 가까운 전략이 등장합니다. MOBA 장르가 e스포츠 종목으로서 잠재력이 높은 이유죠." 윤 이사가 생각하는 MOBA의 매력.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유명 MOBA는 대개 PC 기반이다. 리그오브레전드나 도타 시리즈 말이다. 베인글로리는 모바일 기반이다. 대개 모바일 MOBA는 단순하다. 화면이 작고, 조작이 어렵고, 하드웨어 성능이 떨어지니 타협할 수밖에. 모바일 기반은 미니 MOBA라 부를 수 있겠다.

윤 이사는 말한다. 베인글로리는 다른 모바일 MOBA랑 다르다고. 게임 전개 양상, 퀄리티, 전략의 깊이 등을 놓고 봤을 때 PC MOBA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다. 이유 있는 고(高)퀄리티다. 자체 게임개발 엔진 '이블엔진' 덕분이다. 슈퍼이블메가코프 경쟁력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블엔진은 포르쉐나 페라리 엔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최대 퍼포먼스를 낼 수 있지만 장인이 한땀한땀 만들어야 해요. 범용이 될 수 없습니다. 기존 모바일 게임엔진은 포드나 현대 같은 대중 브랜드 범용 엔진이죠. 이 엔진으론 누구나 굉장히 많은 차를 만들 수 있지만 성능은 고만고만합니다." 윤 이사가 그랬다.

이블엔진으로 빚은 베인글로리는 보완을 거듭해 완성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 정식 출시 이후 가장 큰 업데이트를 준비 중이다. 5대 5 모드를 추가할 예정이다. 기존엔 3대 3이 기본 틀이었으나 향후 플레이어 10명이 5대 5로 편을 갈라 경기를 펼칠 수 있다는 얘기다. 베인글로리 유저가 아니라면 와닿는 변화가 아닐지 모른다.

윤 이사가 설명했다. "5대 5 모드는 단순히 플레이어 숫자만 늘어나는 게 아닙니다. 게임을 거의 새로 개발하는 작업이죠. 게임성이 완전 달라집니다. '모바일 게임이 PC 게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여행의 종착점이랄까. 이제 '모바일 MOBA'가 아닌 'MOBA'로서 리그오브레전드, 도타와 경쟁구도를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 출처=슈퍼이블메가코프

 

"e스포츠 에코시스템, 이렇게 완성하세요"

변수가 많아지니 게임 자체가 깊어질 수밖에. 슈퍼이블메가코프는 5대 5 모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곧 공개한다. 오는 14일부터 나흘간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베인글로리 월드 챔피언십'에서. 지역별 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세계 대회다.

윤 이사는 베인글로리 e스포츠 생태계(Ecosystem)를 구축하려고 애써왔다. 세계 대회를 정착시키는 데 2년이 걸렸다. 현재 지역별 6개 리그가 시즌제로 운영되며 리그 챔피언끼리 월드 챔피언십에서 최종 우승팀을 가린다. 베인글로리 프로·아마추어팀이 북미와 유럽에만 3000여개나 있다.

아직 e스포츠로 얻는 수익보단 투자가 많은 현실이다. 슈퍼이블메가코프 말고 다른 회사 사정도 마찬가지다. 윤 이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e스포츠 생태계를 완성해 새로운 산업으로 정착시키겠단 의지를 품고 도전하고 있다.

윤 이사는 한국 게임 현주소에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안타깝죠. 세계 어디 내놔도 알아주는 게임사는 있지만 세계시장에 어필한 한국 게임은 별로 없습니다. 워낙 내수가 강해 독불장군으로 살다보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소홀했던 거죠."

국내 주류 장르인 MMORPG(대규모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글로벌 진출 제일 큰 난관이 이겁니다. 외국 사람에게 이게 왜 게임인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오토 시스템 때문에 '게임인데 왜 난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반응이 나올 듯합니다. 게임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상황이죠. 해외 플레이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고봐야겠지만."

그는 게임이 영화 산업의 길을 걸고 있다고 진단했다. "앞으론 블록버스터 아니면 성공하지 힘들 겁니다. 블록버스터를 개발할 수 있는, 과점 형태를 이루는 회사와 작은 인디 개발사로 생태계가 양분될 전망입니다.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인디 개발사를 큰 회사가 사들이는 식이 되겠죠. 영화 시스템처럼."

▲ 사진=조재성 기자

'궁극 목표'를 묻자 윤 이사는 바로 답했다. 특유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결국 베인글로리가 잘돼야죠. 모바일이 대세가 될 것이란 비전으로 시작했습니다. 비전이 이뤄져야 제 생각이 옳았다는 거잖아요. 비전을 이루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베인글로리를 통해 e스포츠 생태계를 이렇게 완성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e스포츠를 산업으로 자리잡도록 하는 일을 해낸 사람은 아직 없거든요."

마지막으로 한국 게이머에 전하고픈 메시지를 남겼다. "게임, 열심히 하세요. 전 어릴 때부터 SF를 좋아했어요. SF 장르 자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죠. 당시 SF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SF가 주류 문학에 뒤지지 않는다'는 부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SF와 주류 문학은 추구하는 가치가 전혀 다른데 따라가려는 자체가 스스로 열등감을 보이는 게 아닌지.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하는 말이 있죠. 'SF의 90%는 쓰레기다.'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류 문학 90%도 쓰레기이긴 마찬가지야. SF는 대부분 쓰레기이지만 난 그걸 좋아해!' 게임도 마찬가지예요. 게임을 한다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그냥 게임은 게임이니까 하는 거지, 이유가 필요한가?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