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기업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멋들어진 로고, 그 다음이 주력 제품이나 솔루션이다. 그런데 한국후지제록스 장은구 부사장을 만나러 서울 CDC(Communication Design Center)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텅빈 ‘공간’이었다. 솔직히 최신형 프린터 한 대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이 기대를 한순간 무너뜨리게 한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커뮤니케이션을 디자인하다? 왜?

장 부사장은 에너지 산업 분야이 미국계 회사인 벤틀리 네바다(Bently Nevada) 한국 대표를 역임한 후 GE가 벤틀리 네바다를 인수하자 GE의 에너지 컨트리 매니저(Energy Country Manager)로 활동했다. 이어 GE 금융 부문인 GE 캐피털에서 근무하던 중 현대카드와 GE 캐피털이 조인트 벤처를 설립하자 현대카드 파견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완전히 현대카드로 넘어와 5년을 더 일한 다음 3년 전 한국후지제록스 부사장에 취임했다. 에너지부터 금융, 하드웨어 등을 아우르는 화려한 경력이다.

장 부사장은 B2B부터 B2C, B2B2C 등 다양한 영역을 경험한 노하우를 살려 CDC라는 공간을 창출했다. 장 부사장은 CDC를 두고 “기존 비즈니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실현된 공간”이라며 “한국후지제록스는 이미 10년 전부터 단순한 복합기 제조, 판매 회사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하는 컨설팅 기업이라는 것을 표명하고 지향하고 있다. 그 고민에서 탄생한 것이 CDC”라고 설명했다.

CDC는 과거 쇼룸(Show Room)으로 인쇄 장비를 전시하고 데모 테스트를 하는 정도로 활용됐던 다소 식상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장 부사장은 쇼룸 개념의 업데이트 방식으로는 디바이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고 판단했고 직접 구상하고 기획, 설계해 지금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CDC는 거창한 장비와 시설물이 없어도, 비즈니스와 커뮤니케이션 사용자 경험으로 대표되는 한국후지제록스의 경영철학이 진하게 담긴 공간이다.

여기서 궁금하다. CDC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쇼룸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이 넓은 공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장 부사장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라며 “고객의 공감을 얻는 메시지 전달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집중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고, 이를 확실하게 하려면 정형화된 사물이나 기기는 불필요해진다. CDC는 사유의 공간이자 비즈니스 사용자 경험의 무한한 확장이 되는 셈이다. 장 부사장은 “커뮤니케이션을 디자인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현대카드 스타일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장 부사장과의 인터뷰 대부분은 커뮤니케이션의 효과적인 활용에 할애됐다. 한국후지제록스 부사장과 이야기를 하는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와 대담을 나누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장 부사장이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제록스의 창업자는 1900년대 초에 이미 ‘제록스는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하는 회사’라는 기업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며 “그러나 고객들의 인식 속에 하드웨어 기업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고객의 인식 전환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키워드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을 포함해서 문서, 디지털 정보의 교환까지 방대한 영역을 포함한다. 왜 CDC가 ‘공간’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장 부사장은 “업계에서 일반 가정, 사무용, 전문 상업용 인쇄기까지 라인업을 갖춘 기업은 후지제록스가 유일하다”며 “A부터 Z까지 모든 것이 지원되는 컨설팅 기업의 가치가 여기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에 둔 CDC가 컨설팅 기업으로 나아가는 한국후지제록스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은 이해됐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필수조건은 브랜딩이다. 방법이 있을까? 장 부사장은 “새로운 비즈니스 콘셉트를 설정하고, 기존 비즈니스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콘셉트로의 스토리텔링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결국은 사람에 집중해 관계, 즉 커뮤니케이션을 발전시키는 사용자 경험이 브랜딩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장 부사장은 “고객에게 브로슈어를 제공하면서 제작 단가와 배포 물량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방식”이라며 “여기서 브로슈어의 콘텐츠와 고객의 반응이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가 돼야 하고,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철학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하드웨어 기업 정체성에 천착하는 많은 기업들이 새겨들어야 할 점으로 보인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하드웨어도 생태계 전략이 필수

한국후지제록스의 CDC는 하드웨어 기업이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사용자 경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제품 중심의 단방향 소통이 아닌, 일종의 백지를 꺼내 상상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컨설팅, 브랜드의 가치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말로 풀어보면 간단한 이야기지만 실상은 매우 어렵고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다. 장 부사장은 “17년 연속 고객만족도 1위, 10년 전부터 차별화된 문서 관리 서비스와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는 자부심, 제로그라피라는 기술을 처음 발명하고 건식 보통 용지 복사기를 상용화한 기술력, 모든 프로세스를 아우를 수 있는 기초체력이 지금의 시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며 “하드웨어 기업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생태계 전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본의 모 대학의 경우 동창회를 통해 거액의 기부금을 낸 동문의 이름을 따 건물명을 정하지 않고 동문이 재학하던 시절의 소소한 추억을 일으키는 사진이나 이슈를 정리해주고 기부금의 활용도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시스템을 보여주자 엄청난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며 “결국은 커뮤니케이션이 답이며, 이를 생태계 관점에서 부드럽게 컨설팅하는 것이 한국후지제록스는 물론 모든 하드웨어 기업들의 생존전략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