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반포동 부동산 앞에 전시된 반포 일대 아파트 매물표. 출처=이코노믹리뷰 김서온 기자

일정 보증금을 맡기고 타인의 집에 임차(돈을 내고 남의 물건을 빌려 씀)한 뒤 상호 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주택임대차 종류 중 하나인 ‘전세’ 제도는 일반적으로 주택시장에서 이뤄지는 매매와 월세(집이나 방을 빌려 다달이 세를 내는 것)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부동산 유형이다.

정확한 집계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전국 전세 주택가구 수와 평균 전세가를 곱했을 때 현재 전세보증금 규모는 5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보증금은 주택을 담보로 해 일정기간 거주하는 조건으로 주택 소유자에게 건네는 채권이다. 이자를 대신해 거주를 한다고 볼 수 있다. 가계부채 1380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일종의 채권인 전세보증금을 얹게 되면 우리나라 부채규모는 더 늘어난다. 무려 2000조원에 육박하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지난 8월 2일 부동산관리대책을 내놓으면서 내년부터 더욱 강화된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시행한다. 시중은행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LTV(Loan To Value, 주택담보대출비율)를 주택가격의 40~50%로 줄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주택임대제도 ‘전세’의 맹점이 드러난다. 개인 간 거래인 전세보증금에 LTV는 적용되지 않는다. 전세보증금 산정은 일견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인중개사들과 주택소유자들의 협의에 따라 정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세 수요가 늘어날 경우 보증금은 주택가격의 90%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발생한다. 전세보증금이 높아질수록 소위 갭투자자들은 기승을 부린다. 깡통전세는 물론 주택시장의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깡통전세가 늘어날 경우 전세보증금은 또 다른 미회수 채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수수방관이다. 가계부채관리 종합대책에도 부동산관리대책 어디에도 전세보증금에 대한 규제나 대책 마련 움직임은 없다. 우리는 지금 아무런 규제도 없고 제한도 없는 전세보증금제도에 갇혀 살고 있다. 이제 전세보증금은 부동산 시장 관점에서 다룰 문제만은 아니다. 천문학적인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가격 하락 전망이 우세한 현 시점에서 전세보증금은 잠재적인 가계부채 위험 뇌관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코노믹리뷰>는 스페셜리포트를 통해 세계에서 유일한 대한민국 전세보증금 제도와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봤다.        

한국학중앙연구회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세 제도의 기원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산과 인천, 원산 등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외국인들이 스스로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도록 조약에 의해 토지를 빌려주고 치외법권을 부여한 지역) 조성, 농촌인구 이동 등으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주택임대차거래’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 말기 전세가격은 기와집과 초가집에 따라 달랐으며, 보통 집값의 반 정도로 전세값을 받았으며 비싼 곳은 집값의 7~8할(현재 전세가율 70~80%)에 육박했다고 한다. 전세기간은 통상 1년, 기간을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는 “세입자에게는 임대계약 만료 후 보증금을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는 전세제도가 더 유리하다. 하지만 저금리 환경으로 인해 임대인의 전세보증금을 활용한 수익구조가 열악해짐에 따라 전세제도는 더욱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재 우리나라는 임대인(집주인) 우위 시장이다. 때문에 임대인이 선호하는 월세나 반전세가 임대시장에서 더욱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권 이사는 “더불어 연이은 부동산 대책으로 인해 매매열기가 사그라들고 있다. 실수요자들조차 매매보다는 전세를 선호하는 상황이어서 시장 내 전세물량이 희소한 상황에서 수요는 늘어났기 때문에 전세가는 상승추세를 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과거에는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 부족이 심각한 상황으로 전세가 확산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또 주택가격이 꾸준히 오름세를 타면서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수요자층의 경우 전세를 대체할 대안(공공주택)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975년 전체 가구의 17.3%에 불과하던 전세가구 비중이 1995년에는 29.7%로 증가했다. 2000년 403만9000가구에 이르던 전세가구는 2010년 376만6000가구로 감소했다. 이어 전세가구는 2015년 296만1000가구로 집계됐다.

전세가구의 수요가 꾸준한 만큼 일반 주택을 매매하는 수요자들뿐만 아니라 전세로 거주하는 수요층을 위한 전세자금대출도 있다. 주택금융공사와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보증보험 등의 보증을 받아 전세자금을 마련하거나 보증보험 없이 일반 시중은행을 통해 전세 보증금을 빌릴 수 있다. 전세자금대출 최대한도는 80%이며, 제2금융권(은행을 제외한 금융기관)의 경우 100%까지 가능하다. ▲한부모가족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권자 ▲신혼부부 ▲다자녀의 경우 우대금리를 적용받아 대출을 받을 수 있다.

▲ 5대 시중은행 전세자금 대출잔액. 출처=이코노믹리뷰 이정연 기자

은행권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신한·KB국민·우리·KEB하나·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42조원가량으로 조사됐다. 2016년 말 전세자금 대출 잔액은 34조485억원으로 2015년 말(23조6636억원)보다 10조3849억원(43.9%)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 5대 시중은행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2010년(2조3196억원) 이후 6년 사이에 15배 급증했다.

일반적으로 전세가는 매매가의 60~70% 선에서 결정되며 지역별, 입지, 전용면적, 층수, 주변 인프라 등에 매매가와 동일하게 상이하게 결정된다. 이처럼 주택 매매가 대비 전세 값의 비율을 ‘전세가율’이라고 한다.

통상 주택담보대출액과 전세금을 합한 금액이 집값의 70%를 넘어서면 ‘깡통전세’로 분류된다.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어 집값이 하락할 경우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보증금 비율)이 높을수록 전세입자는 전세금을 떼일 위험성이 높아져, 시장에서는 돈이 다 떨어진 상태를 속되게 이르는 형용사 ‘깡통 차다’와 ‘전세’를 결합해 깡통전세로 부른다.

집주인에게 일정 목돈을 맡기고 정해진 기간 동안 집을 빌려 사는 전세제도가 변형된 형식도 있다. 주택시장의 침체가 지속되고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거나, 입주물량은 적고 재건축에 따른 이주 수요가 증가하는 경우 반전세(준전세)로 바꿔 계약을 맺기도 한다. 반전세는 수익형 부동산과 같이 기존 전세 보증금과 함께 매달 월세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6.19 부동산 대책에 이어 발표된 8.2 대책 이후에도 서울 아파트 전세 값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강남구 도곡동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60대 권 모 씨는 얼마 전 부동산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년짜리 전세 계약이 끝나가는 권 씨 소유의 아파트를 현재 보증금에서 적게는 1억에서 2억 이상 더 받아 새로 계약을 맺게 해주겠다는 것. 이어 다음날 세입자로부터 당장 보증금을 1억 이상 올릴 수 없으니 매달 일정 월세를 더 내겠다는 전화를 받았고 고민 끝에 권 씨는 세입자와 타협점을 찾아 기존 보증금 6억원을 유지하는 대신 월 100만원을 더 받는 조건에 2년 전세 계약을 연장했다.

서울 서초구 도곡동 R아파트(2006년 1월 입주)의 경우 전세 만기를 앞둔 매물의 리스트를 뽑아 인근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증금을 8000만원에서 2억까지 올려 받을 수 있으니 다시 집을 내놓으라는 전화를 돌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가을 이사철을 맞이해 전세수요가 증가하는 시기인 데다가 특히 강남 4구는 재건축에 따른 이주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면서 “반면 이에 비해 입주물량은 많지 않기 때문에 전세난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지연 리얼투데이 리서치팀 팀장은 “전세의 경우 저소득층의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로, 월세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비교적 양호한 주거환경을 제공해 왔다”면서 “저금리와 부동산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경우 전세비중은 차츰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