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와 카카오는 최근 각 사업부를 분사시켜 빠르고 기민한 조직 문화를 조성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네이버는 네이버랩스가 분사됐고 카카오는 카카오페이와 카카오 모빌리티가 각각 떨어져 나갔다. 거대한 플랫폼, 조직이 일종의 ‘화수분’이 되어 게릴라 전략을 중심에 두고 각개전투에 나서는 방식이다.

삼성전자의 C랩(Creative Lab)도 비슷하다. 사내벤처 공모 프로그램인 C랩은 거대조직 삼성전자가 소규모 조직을 구축해 분리, 일종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재미있는 실험이다.

▲ 사진=이코노믹리뷰DB

C랩, 이건 인사의 마술이다

지난 2012년 삼성전자가 C랩을 운용한다고 발표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거대조직의 스타트업 따라하기’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당연한 것’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따라하기’였기 때문이다. 마침 구글이 알파벳이라는 모기업을 두고 사업부 분사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스타트업 삼성’의 기치를 걸고 조직문화의 변신을 추구하던 상황이었다. C랩은 그 연장선에서 스타트업 생태계의 역동성을 빨아들이려는 삼성전자의 ‘작은 실험’ 정도로 치부됐다.

결론적으로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스스로가 스타트업 생태계 연구개발의 허브로 작동하기를 원하며, 또 스타트업 특유의 야성을 조직에 체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C랩의 기본은 ‘인사’를 통한 ‘모든 것의 혁신’이라는 키워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재일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 상무는 지난 18일 삼성전자 태평로 사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C랩을 “임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직접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사실 삼성전자는 거대조직으로 움직이며 강력한 리더십과 일사분란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넘어서는 ‘창의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거칠게 말하자면 ‘돌아이 기질을 가진 천재’나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바꿀 혁명가’는 나타나기 어려운 구조라는 뜻이다.

결국 이 상무는 ‘파괴적인 인사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C랩이 구상됐다고 말했다. 거대조직과 스타트업의 소규모 조직의 장점만 취합한 하이브리드 조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네이버와 카카오처럼 IM부문을 분사시키는 수준은 아니지만, 양 극단의 조직문화를 체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C랩은 자율권과 수평조직, 성과기반 파격보상으로 정의된다. 이 상무는 “1년차 직원이라도 C랩에 들어와 동료들을 모을 수 있다”며 “C랩 과제를 수행하는 조직은 대표격인 CL(Creative Leader)을 제외하고 모두 직급이 같다”고 말했다. 나아가 “C랩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사내교육에서도 열외되는 등 완벽한 자율권을 보장하며 스핀오프에 실패하거나 추후 사업이 잘 되지 않아도 문제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스핀오프한 직원이 나중에 사업이 어려워도 경력직으로 뽑는다는 것이 이 상무의 설명이다. 과정에 대한 실패를 용인하고 성과에 있어서는 파격적인 보상을 한다는 뜻이다.

그 덕분일까. C랩의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현재 C랩은 180개 과제가 추진되고 있으며 인력은 750명이 투입되어 있다. 스핀오프한 기업들의 성과도 놀랍다. 산업 건축용 진공 단열 패널을 설계생산하는 에임트(AIMT)는 40억원 규모의 해외 투자를 유치했고, 허밍으로 작곡하는 앱을 개발하는 쿨잼컴퍼니(COOLJAMM company)는 최근 세계 3대 음악 박람회 ‘미뎀랩(MIDEMLAB) 2017’에서 우승하는 등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또, 점착식 소형 메모 프린터를 개발해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최대 가전전시 CES에서 최고혁신상을 수상했던 망고슬래브(MANGOSLAB)는 스타트업으로 독립한지 1년만에 양산 제품을 생산해 9월 본격적인 판매를 앞두고 있다. 망고슬래브는 지난해 6월 창업해 현재 14명으로 인력이 3.5배 증가했고,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근무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일자리 창출의 성공적인 사례로 삼성전자 C랩의 모델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현재 C랩의 상태는 스핀오프가 25개(18%), 사내활용 63개(46%), 단순완료나 드롭이 48개(36%)다. 어엿한 스타트업으로 거듭나는 스핀오프가 18%, 아이디어가 좋아 실제 삼성전자가 활용하는 것이 46%라면 성공률은 64%라는 뜻이다. 실패율은 36%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이 상무는 “우리의 목표는 실패율 90%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이 상무는 “성공률을 지나치게 높게잡아 단순히 목표만을 추구하는 안일한 C랩을 원하지 않는다”며 “무조건 부딪치고 깨지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C랩이 최종 지향점”이라고 강조했다. 진짜 90% 실패율을 원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90%의 실패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힌다.

▲ 릴루이노 라인업. 출처=삼성전자

릴루미노, 시각장애인의 프로메테우스

기자회견에서 C랩의 릴루미노가 소개됐다. 원래 C랩 과제는 1년을 주기로 하지만 유일하게 릴루미노는 1년이 끝난 현재, 다시 과제가 1년 연장된 독특한 케이스다.

릴루미노는 시각 보조 애플리케이션을 만든다. 전맹을 제외한 1급에서 6급의 시각장애인들이 기어 VR을 착용하고 앱인 릴루미노를 실행하면 기존에 왜곡되고 뿌옇게 보이던 사물을 보다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오큘러스 스토어에서 기어 VR과 호환되는 갤럭시 S7 이후 스마트폰에 무료로 다운로드 받아 기어 VR에서 작동시키면 된다. 쉽게 말하자면, 시각 장애인이 릴루미노 앱을 구동하고 기어 VR을 착용하면 모든 사물이 ‘잘 보인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조정훈 CL에 따르면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 시각장애인 92.1%가 여가시간에 TV를 시청한다는 것에 착안, 시각 장애인도 ‘무언가를 보기를 원한다’는 점이 시작이었다. 나아가 시각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의 가격이 천만원대에 달하며, 많은 사람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해 릴루미노를 고안했다는 설명이다. 2016년6월 과제 선정 후 2016년 9월 프로토타입 1차 개발을 끝냈고 2016년 10월 2차 프로토타입 개발에 나선 후 올해 1월 중앙대학교병원과 함께 임상실험에 돌입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릴루미노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지나가는 시각 장애인들을 붙잡고 기기 테스트를 부탁했다는 후문이다.

▲ 릴루미노 효과. 출처=삼성전자

그렇게 탄생한 릴루미노의 성과는 놀라웠다. 윤곽선 강조, 색 밝기와 대비 조정, 색 반전은 물론 화면색상필터 기능은 백내장, 각막혼탁 등의 질환으로 인해 시야가 뿌옇고 빛 번짐이 있거나 굴절장애와 고도근시를 겪는 시각 장애인이 글자나 사물을 볼 때 보다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더불어 섬 모양으로 일부 시야가 결손된 ‘암점’과 시야가 줄어든 ‘터널시야’를 가진 시각장애인을 위해 이미지 재배치 기능도 제공하며 암점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은 주변 시야에 배치하고, 중심부만 보이는 터널시야는 보이지 않는 주변 시야를 중심부에 축소 배치해 비교적 정상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릴루미노를 소개하는 자리에는 실제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교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본인이 시각장애인인 그는 “지금까지 시각장애인들을 돕겠다며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강제하기만 했지만 릴루미노는 달랐다”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방법일지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릴루미노는 ‘빛을 돌려주다’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이름 그대로 시각장애인들에게 빛을 돌려주고 있는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한 시각장애인 학생은 기어VR을 착용한 상태에서 릴루미노를 시연하며 함박웃음을 머금기도 했다. “일반인처럼 된 것이 너무 기뻐요”

C랩의 우수과제로 릴루미노가 선정되고, 또 릴루미노가 대단한 기술력을 확보한 것은 기자회견 현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누군가에게는 소통의 플랫폼, 즐거움의 소재인 가상현실이 시각장애인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이는 생각보다 커지지 않는 가상현실 시장이 얻을 수 있는 의외의 소득이다. 나아가 기어VR을 활용했지만 추후 릴루미노는 스마트 글래스 형태의 웨어러블 제작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후문이다. C랩 과제가 1년 연장된 이유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릴루미노는 사업성이 제한적이다. 게다가 지속적인 기기 업데이트와 소프트웨어 발전이 이뤄져야 한다.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상무는 “릴루미노는 전세계 2억4000만명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바꿔줄 착한 기술”이라며 “후속 과제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 시각보조 글래스. 사진=이코노믹리뷰DB

조직의 변화와 스타트업, 그리고 영악함

삼성전자는 C랩을 통해 사회공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트업 조직문화를 빠르게 체화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한편 관련 연구개발 플랫폼을 삼성전자의 느슨한 연대에 집결,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러한 행보에는 조직의 변화, 실패를 각오한 용기, 인사적 접근, 스타트업 생태계, 나아가 릴루미노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을 따로 기자들에게 소개하는 영악한 마케팅 전략도 깔려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이러한 접근은 삼성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C랩의 도전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