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LG 부회장이 최근 광폭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그룹 차원의 큰 그림을 그리는 자리를 주재하는 한편 중요한 사업도 직접 챙기며 경영 최전선에 나서는 분위기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구본준 부회장의 영역확장을 한시적 현상으로 보고있다. 구본무 회장에서 구광모 상무로 이어지는 후계구도에서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에만 국한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 구본준 부회장. 출처=LG

구본준 부회장의 활약
구본준 부회장의 광폭행보는 지난해 말 이사회에서 신성장사업추진단장의 역할을 확장하기로 결정되며 시작됐다. 당시 구본준 부회장이 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룹 차원의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LG는 이를 두고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솔루션 등 신성장사업 분야에서의 적극적인 사업전개와 효율적인 성과창출을 위해 주력 계열사 CEO를 역임했던 구본준 부회장의 경험과 추진력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구본무 회장의 판단에 따른 결과"라고 전했다.

올해 2월 LG전자 미국 신사옥 조성 양해각서 체결에도 구본준 부회장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LG전자에 있어 미국 신사옥 건립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끈질기게 매달렸던 테마이자 중요한 북미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2010년 부지를 매입하고 신축 허가까지 받았지만 부지 자체가 뉴욕과 인접해 있으면서 팰리세이즈(Palisades)숲과 허드슨(Hudson)강을 마주한 곳이라 환경단체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옥이 들어서는 팰리세이즈 계곡은 뉴욕 맨해튼에서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건너 북쪽으로 수㎞ 뻗은 절벽 일대를 말하며, 인근 빌딩들이 나무의 높이인 35피트 이하로 지어지도록 개발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 문제는 더욱 복잡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보호에 방점을 찍고 이를 수호하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여기는 록펠러 가문의 반대도 신사옥 건설의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LG전자는 친환경 사옥 건설에 대한 의지를 보이며 끈질긴 설득에 나섰고, 지난해 6월 신사옥 건립에 대한 최종 인허가를 받은 후 올해 2월7일 미국 신사옥 기공식을 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구본준 부회장은 당시 LG전자 이사회 의장이었다.

5월에는 구본준 부회장이 LG임원세미나를 주도하기도 했다. 1995년 2월부터 구본무 회장이 매번 주도했던 LG임원세미나는 최고경영진과 임원 400명이 집결해 그룹의 청사진을 그리는 자리다. 이 자리에 구본무 회장이 아니라 구본준 부회장이 등장한 점은 의미심장하다는 평가다.

구본준 부회장은 6월 초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각 계열사의 전략보고회의도 받고있다. 그룹의 중장기 플랜을 짜는 중요한 자리를 구본무 회장이 아닌, 구본준 부회장이 주재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과 동행하는 방미 경제 사절단에도 구본무 회장 대신 구본준 부회장이 이름을 올렸다.

특히 구본준 부회장이 각 계열사의 LG임원세미나를 주도하고 전략보고회의를 받는 대목은 심상치 않다는 평가다. 모두 구본준 부회장이 애착을 갖고 챙겨오던 사안인데다, 당장의 방향성이 아닌 그룹의 중장기 비전을 논의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LG는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LG 관계자는 "큰 그림은 구본무 회장이 그리고, 구본준 부회장의 역할이 다소 늘어났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 LG전자 미국 신사옥 협약식. 출처LG전자

칠순이면 은퇴, LG의 가풍
LG는 '인화'로 대표되는 기업문화와 특유의 유교적 가풍이 결합되어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다. 장자승계원칙이 지켜지는 상황에서 여성을 경영 최전선에 배치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승계구도 과정에서 유혈이 낭자한 칼부림이 벌어지지만 LG가 무풍지대로 남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최순실 비선실세 논란 당시 LG와 관련된 이슈가 상대적으로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승계구도에 있어 정부에 아쉬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청탁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LG가 최순실 비선실세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현재 재계 서열 4위인 LG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에 총 78억 원을 기부해 삼성과 현대차, SK에 이어 4번째를 기록했다. 사실상 양 재단이 비선실세의 손에서 놀아났다는 정황이 속속 포착된 가운데 LG도 재계서열에 걸맞는 액수를 낸 셈이다.

다만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SK는 최태원 회장 사면, 롯데는 경영권 분쟁, 한진그룹은 법정관리 이슈 등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LG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장자승계와 유교적 문화, 인화의 조직 분위기 등이 나름 위력을 떨친 결과다.

그런 이유로 구본준 부회장의 광폭행보는 다소 낯설게 받아들여진다. 이를 확인하려면 LG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LG그룹의 구인회 창업주는 1969년 가을에 병을 얻어 그해 12월31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LG는 구인회 창업주의 장례식을 치른 후 1월6일 시무식을 열어 창업주의 장자인 구자경 부사장을 2대 회장으로 추대한다.

그 과정에서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이 보여준 처신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구철희 사장은 형인 구인회 창업주 상태가 날로 악화되던 시기 동생들과 조카들을 불러 자신은 경영승계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며 창업주의 아들인 구자경 부사장이 그룹을 맡아야 한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LG의 장자승계원칙이 자리잡는 배경이다.

구자경 회장에서 구본무 회장으로 이어지는 승계구도도 깔끔했다. 1995년 2월 구자경 회장은 나이 70이 되던 해 경영권을 당시 50대이던 장자 구본무 부회장에게 넘긴다. 장자승계원칙에 칠순은퇴라는 원칙이 더해지는 순간이다. 나아가 구본무 회장도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당장 10년 후라도 물러날 수 있다"는 말로 칠순은퇴원칙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이전과는 다르다. 구본무 회장이 올해 만 72세가 된 상태에서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의 보폭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장자승계원칙과 칠순은퇴원칙 모두 지켜지지 않게 된다.

여기에는 특수한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일단 구본무 회장의 건강에는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꾸준한 운동과 건강관리로 경영 활동에 불편함이 없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렸던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 당시에는 건강을 이유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과 함께 조기귀가하는 등 체력에 부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일단 큰 문제는 없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문제는 후계구도의 완성에 필요한 양성작업이다. 아들이 없는 구본무 회장은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인 구광모 상무를 2004년 양자로 입적시켜 장자승계원칙에 따라 승계구도를 짜고 있다. 그러나 1978년생 구광모 상무가 전면에 나서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구광모 상무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는 2006년 LG전자에 입사해 2014년 1월까지 HA사업본부 부장을 역임하고 2014년 4월부터 LG 시너지팀에서 경영승계수업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9일 기준 LG의 지분구조를 보면 구본무 회장이 11.28%, 구본준 부회장은 7.72%의 지분을 가진 상황에서 구광모 상무는 6.24%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구본무 회장 입장에서는 후계구도를 짜는 상황에서 구광모 상무의 후계수업에 나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징검다리 역할을 구본준 부회장이 하고있다는 말이 나온다.

1951년생인 구본준 부회장의 나이가 올해 만 66세라는 점도 중요하다. 올해 만 72세인 구본무 회장의 동생이라는 점에서 바로 대권이 그에게 넘어오기에는 여러모로 무리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구인회 창업주에서 구본무 회장에서 이어지던 시기, 구철회 사장이 보여준 역할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 지난해 국정농단 청문회에 참석한 구본무 회장. 출처=국회TV

변수는 없을까
재계에서는 구본무 회장과 구광모 상무로 이어지는 승계구도에 무게를 둔 상태에서 구본준 부회장의 광폭행보를 이해하고 있다. 칠순은퇴라는 원칙은 어려워졌으나 장자승계원칙에 따라 유연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LG는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LG의 뜻대로 흘러간다면 4대로 이어지는 경영승계도 인화의 LG다운 분위기로 흘러가는 셈이다. 삼성과 CJ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맹희 전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신경전, 기어이 그룹 재편까지 이어졌던 현대가의 알력, 대세는 굳어졌으나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롯데가 형제의 난과 달리 LG는 자연스럽게 방향성을 정하는 셈이다.

구본준 부회장이 구인회 창업주 작고 후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이 보여줬던 역할론을 재연할 것이 높은 상황에서, 제3의 시나리오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LG는 "구본무 회장이 그룹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나름의 선을 긋는 분위기다. 이러한 반응은 구본준 부회장의 역할에 일정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