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접어드는 요즈음 더위가 한 번씩 맛만 보여주는데도 기력이 쇠한 듯 탈진한 상태가 되는데, 화병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힘든 시기가 된다. 50대의 중년 여성들은 가끔씩 진찰도 하기 전에 한숨을 내쉬면서 “선생님 아마 저는 화병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화병이라는 말은 한의학에서 울화병의 줄임말로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스트레스, 심리적 갈등, 불안증상이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 마음에 불기운이(火) 생겨 발산되지 못하고 울체되어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증상이 유독 우리나라 여성에게 많기에 1995년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민속증후군의 하나로 화병(Hwabyung)이란 이름으로 국제 표준어로 제정되어 있다.

화(火)라는 것은 분노가 과다하거나 심리적 억압이 지속되어 가슴, 얼굴, 머리 부위에 열감이 있으며 인체의 여러 부분에서 다양하게 증상이 나타난다. 증상으로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답답한 증상이 발생하고 얼굴이나 목덜미에 열이 오르고 얼마 후에 식은땀과 한기가 든다. 두통, 안구 건조감, 불면증 등도 발생하며 인후부나 명치 부위에 뭐가 걸린 것 같은 이물감, 소화장애 포만감, 복통 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심리적인 분노나 억압이 심해지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는 불안장애, 강박증, 공황장애 등의 상태로 진행하기도 한다.

화병이 우리나라에 많은 이유는 외국인들이 지적하는 ‘표정 없는 한국인’이란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정이나 말로 드러내지 못하는 영향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다가 스스로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가부장적인 문화로 인해 며느리들의 위치에서 오는 압박감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직장에서는 조직문화의 압박감,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취업이 늦어짐, 결혼문제 등도 원인이 된다.

화병은 오랜 기간의 분노에서 유발된다. 분노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네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째 분노기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시기이다. 시간적으로 수분에서 수일 사이이다. 둘째 갈등기이다. 이 시기에는 분노를 해소하는 기간인데 다툼이 있는 경우 용서할까 말까 갈등하는 시기로 불안하거나 쉽게 놀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셋째, 체념기로서 참는 생활을 지속하는데 더 이상의 큰 스트레스가 없는 경우는 참으며 보내지만, 마음속으로는 억울함이나 분함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기에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증상이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거나 반대로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릴 수도 있다. 넷째, 증상기로서 오랜 기간 동안 인내로 인해 억울함은 가라앉은 것 같지만 억제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다. 갱년기와 겹치면 증상이 확연히 드러나며 분노보다는 불안이나 우울함이 잘 나타난다.

한방에서는 한약치료와 침구치료를 병행한다. 한약의 처방은 화를 직접적으로 내려주는 청열약(淸熱藥), 울체된 기운을 소통시키는 이기약(理氣藥), 화를 내리고 위해 진액을 보충해주는 자음강화약(滋陰降火藥),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안신약(安神藥)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침구치료는 백회 전중 중완 합곡 신문 삼음교 등의 혈자리가 효과적이며 그 외에 이완요법으로 호흡법 명상법 등도 도움이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존감의 상실과 급변하는 환경 그리고 경제적인 압박감 속에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분노나 스트레스를 어떻게 잘 표현하고 내보내느냐에 따라 건강한 생활과 병적인 생활의 귀로에 있다. 스트레스는 단지 정신적인 화병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면역관계 및 기초 대사에도 영향을 미쳐 심혈관계 질환, 암, 자가면역 질환, 대사성 질환 등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화병의 적극적인 예방과 치료가 우리 삶의 질 향상과 건강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참고자료 출처: 대한 한방 신경정신과 학회 화병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