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회장이 박정호 사장과 함께 24일 오후 2시 일본으로 출국했다. 입술이 부르튼, 다소 피곤한 얼굴로 공항에 나타나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가 일본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룹의 명운을 건 한판승부. 즉 SK하이닉스의 도시바 인수전에 힘을 보태기 위한 행보다.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렸던 최태원 회장은 최근 검찰의 불기소 결정으로 출국금지가 풀린 상태다.

현재 도시바 인수전은 혼전 그 자체다. 도시바의 원전사업 손실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인수가도 점점 올라갔고, 이와 비례해 군침을 흘리는 기업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최초 두각을 보였던 곳은 대만의 홍하이다. 일본 디스플레이의 자존심 샤프를 품었던 홍하이는 필요하다면 SK하이닉스나 자국의 TSMC와 연합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며 인수전에서 숱한 연막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비입찰 당시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주역인 칭화유니그룹이 도시바 인수전에서 빠진 상황에서, 홍하이는 말 그대로 전력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일본 정부는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 2위인 도시바를 타국에 넘기는 것은 국부유출이자 국가안보적 측면에서 리스크가 높다는 판단이다. 다만 '굳이 넘겨야 한다면' 아시아 국가가 아닌 동맹국인 미국 기업이 인수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 지점에서 애플과 아마존이 한 때 유력한 인수 후보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웨스턴디지털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도시바와 공동전선을 짜고있는 웨스턴디지털은 미국 기업이라는 점에서 일본 정부의 입맛에 맞고, 나름의 현지화 정책도 추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산업혁신기구와 일본정책투자은행, 미국의 사모펀드 KKR(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로 구성된 일본 관민펀드에 참여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쉽지 않은 싸움을 벌일 전망이다. 결론적으로 일본 정부가 중국과 대만, 그리고 한국 등 아시아 기업에 도시바를 넘기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한데다 마련할 수 있는 자금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예비입찰에서 SK하이닉스는 최대 2조엔의 인수가를 제시했으나, 미국 실버레이크-브로드컴 컨소시엄은 2조엔을 넘긴 것으로 보이며 홍하이는 3조엔의 입찰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SK하이닉스가 던질 수 있는 카드는 '이해관계의 조정'에 있다. 액수로는 경쟁자를 압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 민관펀드에 합류해 철저한 현지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일본 정부의 국부유출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걷어주는 보안책을 제시하는 방법론이다. 이에 최태원 회장은 출국 직전 기자들과 만나 "SK하이닉스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고민할 것"이라면서도 "도시바와 이해관계자들과 협업을 통해 여러 방안을 찾겠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 길을 찾겠다는 뜻이다.

SK하이닉스 내부에서는 인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기류가 팽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자체가 장기호황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상황에서 D램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탈피, 비상하는 낸드플래시 시장의 인프라를 초기에 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SK하이닉스는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낸드플래시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으며 SK그룹 차원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공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분명 어려운 싸움이지만 최태원 회장의 '승부수'에 기대를 거는 시각도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2012년 일각의 비판을 무시하고 하이닉스를 인수, 현재의 알짜배기 기업으로 키워낸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의 경우 반도체 전략과 관련해 일종의 스토리텔링, 즉 콘텐츠가 있는 사람"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현지에서 도시바 및 일본 정부 관계자와 만나 그들의 우려를 덜어내는 한편, 나름의 양보를 통해 일발역전을 노릴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