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뜨니 온통 눈부신 별 밭이다. 딱딱한 붓 칠이 거칠어 보이지만 반 고흐 특유의 풍성한 색채가 무릎까지 흘러내릴 것 같다. 실제 그림 배경이 된 프랑스 아를 지방 지형이 고스란히 재현됐다. 땅의 높낮이가 느껴지고 나뭇잎 한 장에도 고흐의 붓 터치가 생생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 별빛부터, 그가 늘 거닐었다던 론 강의 고요함까지 느껴진다. 여기는 오니라이드(ONIRIDE)가 제작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가상현실 콘텐츠 안이다.

꿈 같은 가상현실(VR) 콘텐츠를 계속 만들고 싶다는 사람을 만났다. 오니라이드의 공동창업자 미첼 브로너 스콰이어. 오니라이드는 이탈리아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업체다. 2014년 6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설립되었으며 가상현실 기기를 이용해 디지털 박물관 및 광고 콘텐츠를 제작한다.

이탈리아어로 오니는 ‘꿈 속에서’, 오니라이드는 ‘눈앞에서 꿈을 이룬다’는 뜻이다. 오니라이드의 공동창업자 미첼 브로너 스콰이어는 로마에서 11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이른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오니라이드의 가상현실 콘텐츠가 유명해지며 출장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일정쯤은 거뜬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스콰이어는 오니라이드를 설립하기 전 변호사로 7년간 일했다. 하지만 늘 IT 분야에 열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니라이드는 기술 회사라기보다 스토리텔링 기반의 콘텐츠 회사”라고 밝혔다. 가상현실 기기를 이용해 디지털 박물관에 쓰일 콘텐츠를 만들고,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 만화 <마그네티크>를 제작했다. 특히 문화유산 콘텐츠 제작에 힘쓰고 있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인기 만화 캐릭터 가상현실 콘텐츠에 등장시킬 것”

가상현실 만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가상현실 플랫폼이 만화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플랫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콰이어는 “가상현실은 새로운 언어”라며 “가상현실은 콘텐츠를 구현하는 강력한 플랫폼이다. 이용자는 소리를 듣는 동시에 볼 수 있으며, 극대화된 몰입감을 통해 콘텐츠 안에서 실제 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칠레 영화감독이자 극작가, 타로 카드 점술사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SF 그래픽 노블 같은 콘텐츠를 가상현실에 구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의 ‘만화 소설’로 <설국열차>를 떠올리면 된다. 오니라이드는 일반인에게 친숙한 디즈니 캐릭터 등 이미 알려진 만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오니라이드가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 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예술과 문화’를 알리는 것이다. 스콰이어는 “오니라이드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탄생한 기업이다. 이탈리아에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많은 문화유적들이 가득하다. 숨겨진 보석 같은 문화재들을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유명 화가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는 영화 배급사이자 전시 기획사 넥소디지털과 손잡고 예술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구글 아트와 문화 프로젝트 일환으로 제작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콘텐츠가 있다. 이용자들은 실제 그림 안으로 들어가서 마치 그림 안에서 걸어 다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가상현실 콘텐츠 안에서는 반 고흐 특유의 섬세한 붓 터치와 화려한 색감이 손에 묻어날 듯 생생하다.

오니라이드의 대표적인 가상현실 만화 콘텐츠는 6살 남자아이 네로의 이야기다. 네로는 전쟁으로 풍비박산이 난 고향을 되찾기 위해 적들과 맞서 싸운다. 360도 파노라마 장면으로 중간 중간 몰입감을 유도하는 대화창이 등장한다. 3D 화면 속에서 대화창은 일반 만화와 다르게 사용자의 시선에 따라 움직인다. 이 만화는 오큘러스 스토어에서 1만5000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스콰이어는 “가상현실은 최신 트렌드다. 어떠한 지침서도 없는 새로운 분야이기 때문에 모든 걸 새로 개척해야 한다”며 “한계가 없다는 점이 가상현실 콘텐츠를 만드는 데 최대 장점이자 어려운 점이다. 한 장면을 어떻게 사용자에게 효율적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 주변 환경은 어떻게 생생하게 구현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가 가상현실에 집중하는 이 시점, 이탈리아 정부는 어떨까? 오니라이드는 두 개의 지역 정부에서 재정적인 후원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느리고, 디지털에도 약하지만 문화유산 전승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높다. 최근 이탈리아 정부는 박물관에 처음으로 증강현실(AR) 플랫폼을 도입했다.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스캔하면 관련 정보가 나타나는 방식이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가상현실 콘텐츠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

오니라이드 직원 중에는 작가도 있다. 그는 책을 낸 적도 있으며, 실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스콰이어는 어떤 이야기를 가상현실 콘텐츠로 만드냐는 질문에 “공간을 잘 활용할 수 있고, 독자와 상호작용이 잘 될 것 같은 이야기를 가상현실 콘텐츠로 선정한다”고 밝혔다. 그는 복합적인 조건을 충족해야 괜찮은 가상현실 콘텐츠가 탄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5년 개봉한 영화 중에 <하드코어 헨리>라는 영화가 있다. 불의의 사고로 부상당한 헨리는 기억이 지워지고 강력한 힘을 가진 사이보그로 부활해 다양한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헨리의 입장에서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진행되는 구도로 몰입도가 매우 높다”며 “이런 영화를 가상현실로 구현하면 이용자가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 스타트업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을까. 스콰이어는 “사람들이 가상현실 콘텐츠를 체험하게 하는 것부터가 도전이다. 특히 오니라이드가 제작하는 그래픽 노블 가상현실 콘텐츠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식시키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그래픽 노블을 아이들이 보는 단순한 만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픽 노블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하나의 유용한 방식이며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 덧붙였다.

오니라이드는 가상현실 만화 <마그네티크>의 중국 진출을 준비 중이다. 스콰이어는 큰 시장인 중국, 만화의 고향 일본, 디지털 전파력이 가장 빠른 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자체 만화 콘텐츠 소비력이 높은 일본 시장을 겨냥해 새로운 콘텐츠 제작에 들어갈 전망이다. 조만간 한국에서도 오니라이드의 가상현실 콘텐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