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제법 겨울다운 날이었다. 옷깃을 여미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쌀쌀했다. ‘2016 소셜 임팩트 콘퍼런스’ 현장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더 뜨겁게 느껴졌다. 이번 콘퍼런스는 ‘UN 지속가능개발목표와 아시아적 가치’를 주제로 진행됐다.

재계와 학계 인사, 직장인, 학생 등이 서울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을 가득 메웠다. 지속가능경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방문객은 450명으로 추산된다. 당초 주최 측이 예상했던 정원 300명은 하루 만에 마감됐다. 쏟아지는 추가 신청 문의에 정원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명성을 쌓고 있는 해외 연사들도 깜짝 흥행에 한몫을 했다. 데이비드 갈리포(David Galipeau) UN 소셜 임팩트 펀드 대표, 다발 파텔(Dhaval Patel) 임파워 휴머니티 대표, 히로시 아메미야(Hiroshi Amemiya) 코퍼레이트 시티즌십 재팬 대표 등 하나같이 최근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인사들이다.

폭스바겐,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채비

이날 첫 기조연설을 맡은 게오르그 켈(Georg Kell) 아라베스크 파트너스 부회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UN글로벌콤팩트(UNGC) 창립자이자 15년간 초대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UNGC는 지난 2000년 발족된 UN 산하 전문 협약기구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둔다. 켈 부회장은 지난 10월 폭스바겐 지속가능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를 직접 만나 지속가능경영과 UN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 대해 물었다.

자동차 제조사 폭스바겐이 업계 안팎의 존경을 받았던 시절이 있다. 동종업계에서는 지속가능경영 선두주자로 꼽혔다. 배출가스 조작사건, 소위 ‘디젤 게이트’ 이후 힐난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천문학적인 과징금, 시장점유율 하락, 브랜드 가치 폭락 등 창사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폭스바겐 내부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10월 지속가능위원회를 새롭게 조직했다. 위원회는 탄소 배출량 감소에 무게 중심을 둘 예정이다. 폭스바겐은 위원회 의장으로 켈 부회장을 선정했다. 결코 달가운 자리가 아니다. 정상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명성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소비자에게 신뢰를 잃은 기업이라면 더욱 어렵다.

켈 부회장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폭스바겐의 혁신을 지원할 계획이다. 그는 “(지속가능경영위원회는) 미국환경보호청(EPA), 환경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전문가들로 이뤄져 있다”며 “폭스바겐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독립적이고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게 자문위원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폭스바겐은 화석연료 자동차에서 전기·무인자동차 등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며 “모든 기업은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어떤 기업은 아무런 대응 없이 그 위기를 넘기지만, 어떤 기업은 위기를 기회로 삼고 대변혁을 이뤄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폭스바겐은 디젤 게이트 이후 많은 것을 잃었다. 브랜드 가치 하락뿐 아니라 치명적인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미국 연방 법원은 지난달 배출가스 조작 혐의로 집단 소송을 당한 폭스바겐의 배상액 합의안을 승인했다. 합의금은 147억달러(16조7000억원)으로 미국 소비자 집단소송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다. 폭스바겐은 집단소송과 별개로 미국 정부에 벌금도 내야 한다. 합의에 반대하는 소비자들로부터 추가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폭스바겐이 지속가능경영 분야에서 재기를 노리는 이유는 눈앞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자동차 제조사는 수십년을 내다보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으며 끝내 시장구조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지속가능경영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켈 부회장도 이에 동의했다.

두루뭉술하게 기업의 ESG를 평가하던 시절은 지났다. 수치화해 기업별로 비교할 수 있는 모델이 나오기 시작한 것. 실제로 아라베스크 파트너스는 기업의 ESG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 ‘엑스레이’를 내년에 발표할 계획이다.

도덕적 의무와 물질적 가치 상응

켈 부회장은 “더 이상 기업들이 투명하지 못한 경영을 펼칠 수 없게 됐다”며 “특히 젊은 세대들은 정보 접근성과 더불어 환경 친화적이고 책임감 있는 경영을 기업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속가능경영은 계절에 따라 바뀌는 트렌드가 아니다. 장기적으로 기업성장에 가장 도움이 되는 솔루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엑스레이가 공개되면) 우리는 기업을 평가할 때 얼마나 환경적인지, 거버넌스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며 “새로운 시대에는 도덕적 의무와 물질적 가치가 상응하게 될 것이다. 리스크 관리와 사회적 책임을 잘할수록 수익성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UN은 작년 9월 향후 15년 동안 국제사회의 발전방향성을 제시하는 ‘세계의 변혁: 2030 지속가능개발의제’를 발표했다. 개발의제는 17개 목표와 169개 세부목표로 이뤄진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주요 골자로 한다. SDGs는 UN이 각국 정부와 기업에게 제시한 지속가능개발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우려 섞인 시선도 있다. 전신인 새천년개발목표(MDGs, Millenium Development Goals)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UN은 지난 2000년부터 2015년까지 MDGs를 표방했다. 공적개발원조(ODA)에 대한 관심 환기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빈곤과 질병, 교육 평등 등에서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SDGs는 MDGs와 어떻게 다를까. 켈 부회장은 SDGs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MDG는 선진국이 후진국의 개발을 도와주는 정부 대상의 프레임워크였다”며 “SDGs는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시민사회도 문제해결을 위한 중요한 동반자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 세계적으로 거버넌스 문제나 자국우선주의, 외국인 혐오 등 오래된 상처 같은 문제들이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며 “기업이나 정부, 시민사회가 SDGs를 계기로 그간 발전시켜온 긍정적인 가치를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