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블로’를 기억하는가. 2년 전 출시된 PC온라인 RPG(역할수행 게임) ‘데빌리언’을 부르는 말이다. 한국판 ‘디아블로’라는 뜻으로 유저들이 그렇게 불렀다. 당시 데빌리언은 디아블로와 비교될 만큼 기대받는 게임이었다.

데빌리언은 박원희 대표가 이끈 프로젝트다. 그는 경기과학고·카이스트 동기와 뭉쳐 지노게임즈를 창업해 야심차게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박 대표의 ‘인생 게임’은 다름 아닌 디아블로였다. 거기서 얻은 게임 경험을 토대로 RPG를 개발하려 했다. 그러니 ‘김치블로’라는 말이 듣기 좋았다.

“데빌리언은 유저들 기대만큼 성적을 못 냈어요. 명백한 사실입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개발이 3년 반쯤 진행된 시점에 블리자드에서 나쁜 소식을 전했다. 디아블로3를 개발 중이라고 공개했다. 데빌리언 개발팀은 뒤집어졌다. 애초에 디아블로2 느낌의 MMORPG(다중 사용자 온라인 역할수행 게임)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진짜’가 새로 나와버렸으니.

디아블로3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5년을 개발한 데빌리언은 역사에 히트작으로 남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한 무수한 게임들처럼 잊혀질 위기에 처했다. 결국 지난해 서비스 중단을 결정했다. 사용자가 계속 감소해 어쩔 수 없었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모바일로 부활한 '김치블로'

‘김치블로’가 부활한다. 모바일 게임으로 돌아온다. 내달 15일 글로벌 출시된다. 게임빌이 배급을 맡지만 그 중심엔 여전히 박 대표가 자리한다. 환경은 조금 달라졌다. ‘테라’로 유명한 블루홀스튜디오가 지난해 지노게임즈를 인수했다. 이젠 블루홀지노게임즈다.

“데빌리언 개발을 시작한 지 8년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한을 풀고 데빌리언으로 전세계 유저를 만나게 됐네요.” 박 대표는 살짝 흥분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겸손한 자신감도 엿보였다. 이유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그의 뒤엔 1세대 모바일게임사 게임빌이 있었다.

박 대표가 모바일 게임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이런 풍문이 나돌았다. “PC게임 개발사가 모바일 게임을 만들면 망한다.”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시절 모바일 프로젝트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여러 게임 배급사를 만났다.

“게임빌과 제일 합이 잘 맞았어요.” 게임빌에서는 데빌리언을 모바일 버전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박 대표는 게임빌로부터 모바일 게임 노하우를 1대 1 과외를 받는 것처럼 집중 전수받았다. 한때 모바일 게임 개발을 쉽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굉장한 착각이었죠.”

▲ 출처=게임빌

데빌리언을 모바일 버전으로 만드는 작업은 신작을 처음부터 만드는 과정과 거의 흡사했다. 원작을 단순히 모바일에 이식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재개발이자 재해석이었다. 재건축이 기존 건물을 허물어버리고 땅을 파서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작업인 것과 같은 이치다.

데빌리언은 흥행 모바일 액션 RPG의 장르 문법을 철저히 따른 게임이다. 흥행한 게임들을 철저히 분석해 유저에 좋은 플레이 경험을 주는 요소를 융합했다. 박 대표는 이런 요소가 데빌리언의 70%를 차지한다고 했다. 데빌리언만의 고유 정체성은 나머지 30%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다.

데빌리언 IP의 핵심은 악마 변신이다. 주인공 캐릭터가 악마로 변신해 색다른 전투를 펼칠 수 있다. 그런데 박 대표는 데빌리언의 차별화 포인트는 따로 있다고 설명했다. ‘전투의 풀-커스터마이징’이 그것인데, 글로벌 유저를 고려한 설정이라고 했다.

“한국향 RPG 문법에서는 성장 중심 체계가 중요합니다. 반면 웨스턴 유저는 자신의 선택을 중시하죠. 데빌리언은 게임 중반부를 넘어가면 스킬과 액션을 유저가 원하는대로 세팅해 어떤 형태로든 싸울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 출처=게임빌

한국 게임은 한국 사회의 샘플링

낙관할 수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시장 상황에 따라 쓴맛을 볼 수 있다.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 주류 장르는 단연 RPG다. 장르 편중 현상에 우려 목소리가 따를 정도다. 포화 상태라고도 말한다. 반대로 글로벌 시장에선 별로 인기가 없다. 내수용 장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니다.

모순적일지 모르겠지만 데빌리언은 ‘글로벌향 RPG’다. 박 대표는 국내외 시장의 ‘변동성’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 “국내 모바일 게임 랭킹 30위권을 보면 올해와 작년 같은 기간 순위가 굉장히 다릅니다. 아시아권은 물론 글로벌 시장은 국내보다 변동성이 더 크고요. 그러니 어떤 특정 시장이 포화됐다고 단정짓긴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변동성’ 역시 불길한 인상을 풍긴다. 기회 말고 위기도 의미하는 탓이다. 특히 게임 산업의 위기라는 말이 메들리처럼 들려오는 현실이다. 박 대표 역시 위기를 체감하고 있었다. 본질을 꿰뚫어 돌파구를 찾아내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게임 업계는 ‘자본을 많이 들이는 것’ 그 틀에서 벗어나진 못하는 것 같아요.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리스크 테이킹이 쉽진 않잖아요. 그러다보니 엄청난 자금을 들여 나온 게임이 유저에 신선한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죠. 딱 돈 들인 값 정도만 하는 그저 그런 게임이 나오는 건데, 갑자기 어디서 난데없이 해외 게임이 날라와서 국내 랭킹 상위권에 꽂히니까 ‘한국 게임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거죠.”

▲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게임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담깁니다. 조금 연장해서 보면, 한국 게임엔 한국 사회를 샘플링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있어요. 둘이 모양새가 닮아있더라고요. 개개인의 의견을 자유 개진하며 토론하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중시하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학습한 나라의 사람들이 만든 게임을 보면 그런 부분이 잘 느껴집니다. 반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게임들을 보면 굉장히 정해진 노선을 따르는, 정답이 있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오력’해서 만들어낸 것들이 많죠. 그렇다고 그 개발자들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개개인의 문제라고 보진 않아요. 타개책이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탈-한국화할 수 있는 지적자산을 지닌 이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게임은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틀을 볼 수 있으려면 자본이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IP가 생명력 얻는다는 것, 지식노동자의 영광

박 대표가 게임으로 성취하고 싶은 건 뭘까. 그는 현실에 충실하다보면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데빌리언 IP(지적재산권)가 생명력을 얻어 훗날에 자신말고 누군가가 그 IP를 활용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이를 “데빌리언의 최고 영광”이라고 돌려서 말했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IP라는 키워드는 여기서도 나온다. 최근 게임업계에서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말이다. 박 대표는 IP라는 용어가 난무하는 상황을 환영했다. 그의 거시적 목표와도 연결되는 부분인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지식산업 혹은 지식노동과도 연결됩니다. 이런 개념이 IP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기 전엔 사실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죠. 이젠 지식산업의 증거를 대라고 하면 IP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을 잘 녹여낸 대상이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인식을 준다면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고 생명력을 지니게 되겠죠. 그 IP는 여러 형태로 널리 쓰일 수 있을 거고요. 지식노동자로서 굉장히 환영할 일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지식노동자는 IP를 남기는 것. 이 시대에 시도해봄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