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구매 조건에서 연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1리터로 단 1m라도 더 달리기 위한 완성차 업체 간 기술 전쟁이 치열하다. 외관으로 보이는 디자인 만큼이나 자동차 성능과 경제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연비가 부각되면서 소비자들은 가격보다 연비를 먼저 따져 보는 실정이다. 이 같은 연비 중요성 대두는 수입차의 인기와 디젤엔진 차량의 판매 증진으로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연비가 실질적인 효율성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 과연 측정된 ‘공인연비’를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기존에 자동차의 성능을 가늠하는 대표적인 수치는 힘을 나타내는 마력이었다. 마력(馬力)은 말 그대로 말이 짐 마차를 끄는 힘으로 말 한 마리의 힘, 즉 75kg을 1초 동안 1m 들어 올리는 힘을 일컫는다. 그래서 마력의 단위는 Horse Power의 약어인 ‘HP’로 사용한다. 자동차 성능에 마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과 자동차가 발명되었지만 대중적인 운송수단인 말과 마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친숙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자동차가 이만큼의 힘을 발휘하는 운송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동차 구입 조건에서 연비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국제 유가 상승과 함께 온실가스 배출 등 환경적인 문제가 붉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97년 교토의정서를 계기로 자동차 배기가스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제유가 상승이 맞물리며 연비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연비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현대·기아차가 미국에서 연비 과장 문제로 1억달러(한화 약 1070억원)의 과징금을 물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다. 미국환경보호청(EPA)은 현대·기아차가 2010년 말부터 판매한 아반떼, 제네시스, 엘란트라, 스포티지 등 13종의 차량 약 90만대에서 연비를 부풀려 표기했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미국 정부의 제재는 국제적으로 자동차 연비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공교롭게도 2012년은 국내 수입차 열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수입차 열풍 진원지도 ‘연비’

국내 수입차 인기의 비결도 든든한 연비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수입차가 독일차, 디젤엔진, 고연비, 고성능이라는 공통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입차가 연비가 좋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국산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비교 자료는 없다. 다만 자동차 관련 리서치 전문회사 마케팅 인사이트가 최근 3년간 새 차를 구입한 2만2815명을 대상으로 공인연비와 체감연비의 차이를 조사한 결과가 주목할 만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수입차의 강점은 경유에서 체감연비가 우수한 동시에 체감비율도 높다는 것이다. 도심에서의 체감연비는 국산보다 25%(12.6km/10.1km), 고속도로에서는 32%(17.9km/13.6km)나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경유를 제외한 하이브리드나 휘발유를 보면 국산차와 수입차가 비슷하거나 국산차가 앞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디젤엔진이 가솔린엔진에 비해 연비가 좋다는 것은 국내 판매 중인 주요 모델도 마찬가지다. 다만 동일 차종 가운데 가솔린과 디젤을 함께 파는 모델을 보면 불과 리터당 3~4km를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몇 km의 연비를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은 만만치 않다. 제조사는 디젤엔진이 가솔린엔진에 비해 평균 400만원 비싼 것을 고려해 배기량을 낮추는 ‘다운사이징’을 하거나 편의사양을 대폭 줄여 가격 인상 폭을 최소화하는 실정이다.

업계 전문가는 “디젤 엔진이 연비가 좋다고 하지만, 연비로 환산하면 최소한 5년 이상은 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5년 후라면 감가삼각비용을 고려해 결코 경제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또 다른 원인인 ‘기름값 인상 효과’도 유효기간을 넘겼다는 지적이다. 국제적으로 연비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고유가 시대가 저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관계자는 “연비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국제 유가가 최고치를 기록하던 2012년부터인데 현재 유가는 2010년 12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상황이 달라졌다”며 “그럼에도 연비가 좋은 경소형차나 LPG 차량은 등한시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라별로 다른 연비 측정···‘마찰’ 불씨

가끔 리터당 20km가 넘는 가공할 만한 연비를 자랑하는 수입차 모델들이 국내에서 연비 문제로 고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입사들이 유럽 연비만을 강조하다가 슬그머니 국내 공인연비를 감추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연비만 보고 차량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은 실주행 연비를 확인하고 실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처럼 나라별 공인연비가 다른 이유는 연비 측정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3년부터 기존보다 강화된 ‘복합연비’를 기준으로 연비 등급을 부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5사이클(5-Cycle)’로 불리는 실주행 여건은 시내, 고속도로, 고속·급가속, 에어컨 가동, 외부 저온조건 주행 등의 변수를 반영한다. 미국의 연비측정 방식과 동일하게 도심주행 연비와 고속도로주행 연비를 각각 55%, 45% 가중치를 적용해 산출한다.

유럽은 도입된 지 20년도 넘은 ‘NEDC모드’로 측정한다. 현지주행 조건을 감안해 급가속이나 에어컨 주행모드 없이 도심주행 비중을 36.8%, 고속도로 주행을 63.2% 적용한다. 중국은 유럽과 같은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일본은 급가속 등을 최대한 배제한 ‘JC08모드’ 측정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현대차 싼타페 2.2 디젤 4륜구동의 경우 한국에서 복합연비는 13.8km/ℓ에 불과하지만 유럽에서는 17.7km/ℓ로 올라가며, 기아차 쏘울 1.6 가솔린은 한국과 유럽이 각각 11.5km/ℓ, 14.7km/ℓ로 차이나는 이유다.

다른 문제는 연비 측정이 복잡한 조건을 설정한 실험실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엔진의 온도와 가속 시간, 공기저항, 타이어 압력, 마찰 저항 등 수많은 조건을 붙여서 연비 측정을 하게 되어 측정된 연비가 공식연비로 붙게 되지만 실제 도로주행 상황은 실험실 조건과 다를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실험실의 표시연비는 실제 도로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라며 “표시연비는 일종의 기준으로 이해해야지 실제 주행 연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비 문제에 대한 국제적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연비 산출 방식이 다르면 수출입이나 과징금 부과 등에서 국가별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 33개 국가는 지난해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합(UN) ‘자동차기준세계포럼’에서 자동차 연비를 측정하는 통일된 기준(WLTP) 마련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